'라스무스와 폰투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9/16 딸 과의 대화 - 십오 소년 표류기
  2. 2007/10/19 개를 키우고 싶어요! - 내 친구 윈딕시 외 3편

딸의 학교 일기 주제가 친구 사이의 우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뭐 특별히 쓸 게 없다고 고민을 하기에 옆에서 조언을 했습니다.

“지윤아. 그럼 이러면 되잖아, 수학 시간에 니가 발표한 답이 틀렸을 때 ‘에이 지윤아 그게 아니지~~.’하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건 기분 나쁘고 속상하니까 틀려도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쓰면 되잖아. 작은 일에서 친구 기분을 생각해 주는 게 우정이라고”

그런데 결국 그 안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발표를 안하겠다는 딸이 간접적으로라도 불만을 이야기 할 기회를 가지면 속상한 게 좀 풀릴까 싶어 위로 겸 한 제안이었는데 딱 거절입니다. 우정에 대해서 쓸 말이 없다고 고민을 하다가 갑자기 <십오 소년 표류기> 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딸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지 내가 먼저 말했는지 하루 지난 시점에서 막 헛갈립니다. 그러나 어쨌든 <십오 소년 표류기>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우정에 관한 딸의 일기 숙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저녁에 아빠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십오 소년 표류기>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빠도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동네 할아버지께서 선물해주신 <십오 소년 표류기>를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다고, 다음에 아빠도 다시 읽어 보겠노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아빠는 소년들이 두 패로 갈라졌다는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이 책을 다시 읽고 딸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길 바라며 그날이 오면 지승이도 읽고 요 아래 지윤의 글에 댓글을 달아주길 바랍니다. 책을 읽고 같이 대화하는 가족, 꿈꾸던 이상형의 가족입니다.

어제 일기를 쓰는 딸을 보며 일기나 독후감은 시켜서 되는 게 아니라 쓰고 싶어서 써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일기가 얼마나 쓰기 싫으면 어른들에게도 일정 분량을 정해주고 매일 일기를 쓰라고 해야 한다는 둥, ‘일기는 지겨워’ 라는 제목으로 일기를 쓰는 둥 몸살을 하는 딸이 한 장 반이나 되는 분량의 일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아주 즐거워했습니다. 일기나 독후감이 연습이 필요한 건 맞습니다. 그러나 연습을 지나쳐서 본 경기엔 출전도 못 할 일이 벌어지면 안 되는 것처럼 일기나 독후감도 적당히 연습시켜야 합니다. 학교생활에서 그 ‘적당히’를 정하기가 어려워서 힘들지만, 교사의 몫이 바로 그 ‘적당히’를 잘 하는 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대충’의 의미보단 ‘적절히’란 의미의 적당히.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 대한 믿음이 그 ‘적당히 교육’의 바탕입니다. 내 아이들의 선생님들께 신뢰를 보내며 <십오 소년 표류기>를 시작합니다.

**** 살아남기 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일명 학습만화라는 미명하에(^^ ?) 살아남기 시리즈와 *** 보물찾기 시리즈로 아이들에게 친근한 책입니다. 외사촌 오빠들이 물려주어서 시리즈를 그야말로 시리즈로 구비하게 된 지윤지승이 방학 내내 그 책만 보려해서 결국 금서로 지정을 했습니다. 볼만큼 보아서인지 아님 만화책과 줄글책이 있을 땐 당연히 만화책으로 손이 가게 된다는 걸 인정해서인지 살아남기 시리즈를 싸서 치우는 데 동의 했습니다. 지승이 줄글을 줄줄 읽을 줄 알아 그 재미를 알게 된 연후에 금서에서 해지 시켜줄 생각입니다. 다른 친구들도 하리하우스 도서실을 ‘만화방’이라 부르기에 취한 조치이기도 합니다.

그 *** 살아남기의 원조 이야기가 쥘 베른의 <십오 소년 표류기>가 아닌가 합니다. 같은 계열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과 이후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위기 상황을 이겨내는 인간의 지혜와 운명 공동체 안에서 협력과 분쟁을 내용으로 하는 책들입니다. 권력욕이 인간성에 감동되어 화해하는 내용이 <십오 소년 표류기>라면, 미지의 자연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화해할 수 없는 공황상태로 치닫는 것이 <파리 대왕>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나 <톰 소여의 모험>은 집단의 ‘살아남기’ 라기 보다는 개인의 끈기와 기지로서 고립 상황을 이겨내는 이야기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로빈슨 크루소>나 <십오 소년 표류기>, <파리 대왕>의 상황설정은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극한 상황이라면 <톰 소여의 모험>은 톰의 가출 소동 정도이니 비교 상황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톰 소여의 모험>은 같은 작가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나 에리히 캐스트너의 <라스무스와 폰투스> 정도의 책과 같이 이야기 되는 게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십오 소년 표류기>를 떠올림에 줄줄이 <톰 소여의 모험>이 떠오르는 건 교육의 힘이 아닌가 합니다. 학창시절 ‘<십오 소년 표류기>와 <톰 소여의 모험>은 모험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배웠던 때문에 나도 모르게 저절로 줄줄 떠오르게 된 겁니다. 여기서 나의 기준으로 굳이 구분을 하자면, <로빈슨 크루소>와 <파리 대왕>은 어른들을 위한 살아남기 모험담이고 <십오 소년 표류기>는 청소년을 위한 살아남기 모험담이고 <톰 소여의 모험>은 <라스무스와 폰투스>와 같이 어린이를 위한 가출 모험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십오 소년 표류기>는 아이들이 더 커서 읽기를 바랬는데, 2학년 때 딸이 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다며 해를 넘기고도 자주 꺼내보니 더 깊이 이해할 여지가 남아서 다행입니다. 아들이 이 책을 재미있게 볼 때까지 딸의 <십오 소년 표류기>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책의 원제목이 <2년간의 휴가>랍니다. ‘휴가’ 라는 말만 들어도 책의 내용이 비극적이지 않음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끝이 해피엔딩이라 아이들이 읽기에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우정에 관한 지윤이의 일기

제목: 사랑

선생님께서 <친구사랑>을 주제로 일기를 써 오라고 하셨다. 이 일로 나는 지금 열심히 생각중이다. 무순 내용을 쓸 지 말이다. 아! 생각났다. 나는 이 내용을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3-3반 친구들아~

안녕! 나는 며칠 전에 <십오 소년 표류기>라는 책을 읽었어. 그곳에 나오는 15명의 소년들은 모두 사이좋게 지내는 친구들이야. 그렇지만 단 2명, 브리앙과 드니팬이라는 소년만이 사이가 나빴어... 하지만 결국엔 먼저 싸움을 브리앙에게 잘 걸던 드니팬도 미안하다고 말하며 다시 우정 깊은 15명의 소년들로 되었어.

그리고 한가지 웃긴 이야기를 들려줄게.

그 15소년 중 서비스라는 아이가 있어. 하루는 3~4명의 소년들이 탐험을 하다가 함정을 하나 발견했어. 그 함정들 중 하나의 함정엔 뼈들이 있었어. 그것을 보고 윌콕스라는 아이가 뼈를 주우려 함정 속으로 내려갔어. 그러고는

“네 발 달린 짐승이야. 다리 뼈가 넷이나 있어.”

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서비스가

“다섯 발 달린 짐승은 아직 못 보았거든.”

하고 말했어.

그 말을 듣고 그 서비스만을 제외한 3명의 아이들이 하하하 하고 웃었어.

나는 이 얘기를 듣고 안 웃을 수가 없었어. 내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 이 4 소년, 즉 15명의 소년들처럼 즐겁게 웃고 지내자는 이야기야~~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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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키우고 싶어요!

<내 친구 윈딕시>  <아주 작은 개 치키티토>  <라스무스와 폰투스> <내 친구 커트니>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한 번쯤은 개에 대한 열망을 품는 것 같다. 거리에서 줄에 묶이지 않은 개를 만나면 은연중에 경계를 하게 되는데, 이는 도시화된 개의 폭력성이 보이지 않게 행인들에게 위압감을 주기 때문이리라. 옆집 개도 아니고 뒷집 개도 아닌 정체성 없는 개가 주는 공포는 ‘광견병’이라는 이름 때문에 섬뜩함을 더한다.


그런데, 슈퍼마켓에 들어와 난리를 피우는 덩치 큰 개를 한 여자아이가 자기 개라며 겁도 없이 집으로 데리고 온다. 물론 개를 위한 갑작스런 선택이었다. 그 후로 그 개와 한 소녀와의 우정이 시작되고 그 개를 인연으로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가 <내 친구 윈딕시>다. 이 책을 읽고나면 개털 알레르기 같은 것 무시하고 내 딸에게 개를 한 마리 사 줄까 하는 마음이 살짝 든다.


<아주 작은 개 치키티토>를 부모의 입장에서 읽으면 ‘그래 이렇게까지 원하는 데 한 마리 사주자.’하는 결심이 막 서려고 한다. 개털로 인한 알레르기보다 정서 불안정이 더 큰 문제지 하며 아이 손을 잡고 애견센터로 갈지도 모른다.


<라스무스와 폰투스>의 주인공인 두 소년이 개 한 마리의 목숨을 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도둑들에 대항하는 모험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 역시 개가 아이들에게는 ‘개’ 이상의 무엇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위의 세 책을 모두 읽은 후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개를 키우게 해 준 건 아니다. 다만 아이들에게는 분수처럼 솟구치는 살아 움직이는 것에 대한 열정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 열정의 대상으로 가장 적당한 것이 바로 ‘강아지’라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를 키우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를 설명할 때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사람에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 주어진 것 같다. 그래서 자식들을 다 떠나보내고 남은 노부부들 중에 후손들에게 쏟고 남은 여분의 사랑을 개를 키우는 데 쏟는가 보다.

형제자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소비되어야 할 사랑을 쏟을 곳 없이 혼자 크는 아이들은 자신 안에서 넘치는 사랑을 ‘독점’이라는 형식으로 분출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이  독점에 대한 욕구가 역으로  ‘왕따’를 만드는 게 아닐까. 옛날에 형제가 대여섯 적어도 서넛이 되던 시절엔 형제들끼리의 갈등도 해결하기 벅찼으므로 굳이 친구관계에서 애정의 서열이나 우위를 가릴 틈이 없었다. 그러니 그때는 지금처럼 친구관계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고 그러니 친구를 따돌릴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형제자매 없이 혼자 크는 아이가 늘고, 그런 경우 자신 안에 넘치는 친구에 대한 열정을 역으로 다른 친구를 따돌림으로써 해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보다 친구를 따돌리는 아이에게 다듬어지지 않은 사랑을 쏟을 대상으로 사랑스런 개 한 마리를! 안겨줘 보는 건 어떨까. 넘치는 사랑을 받을 때 보다 정신없이 사랑을 쏟으면서 얻는 게 더 많은 법이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개를 키우기 힘든 경우 <내 친구 커트니> -존 버닝햄. 비룡소-를 함께 읽으며 개에 대한 환상적이고 아련한 추억하나 만들어 주면 어떨까, 어느 순간이고 우리 가족을 지켜 줄 수호천사로서의 커트니. 개를 사달라고 조를 때마다 <내 친구 커트니>를 읽어주면 자연스레 마음속에 커트니를 키우게 될 것 같다.

아이가 애완동물을 간절히 원할 때 가만 생각해 보자. 우리 아이 마음에 나는 얼마만한 키로 자라있는 지를. 아이를 더 많이 안아 주고 손잡아 주고 바라봐 주고, 반대로 아이가 부모를 안아볼 기회를 주고 손잡을 시간을 주고 바라볼 여유를 주는 것이 서로의 마음에서 서로를 키우는 방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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