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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23 달구지를 끌고
  2. 2007/03/06 업보(業報)를 녹여내는 동심(童心) -제랄다와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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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지를 끌고

 하리 하우스 방부목 데크에 오일스테인을 칠하고 있는데, 딸이 와서 조릅니다.

 “엄마, 책 하나만 읽어 줄 수 있어?”
 “엄마 지금 바쁘잖아.”
 “엄마, 딱 하나만 읽어 주고 하면 되잖아요.”

 저희끼리 한참을 잘 놀더니 일하는 엄마에게 자꾸 조릅니다.

 사실 이럴 땐 눈 딱 감고 책 읽어 줘야 한다는 얘기를 강남엄마 얘긴지 목동 엄마 특목고 보낸 얘긴 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설거지 하다가도 고무장갑을 벗고 읽어 줬단 이야기였습니다. 그럴 수 있는 환경이라면 참 좋은 얘기긴 한데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엄마 설거지 다 하고 읽어 줄게.”
 “조금만 기다려, 빨래 요것만 다하고 읽어 줄게.”

 심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지금 일하는 거 안보여!” (소리 꽥!)

 그냥 보내려다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래, 그동안 잘 놀았으니까 한 권만 읽어 줄게.”

 선심 쓰듯 이야기 합니다. 엄마를 뒤에 달고 가는 딸의 발걸음이 너무 가볍습니다.

 딸과 함께 돗자리를 깔아 논 은행나무 밑으로 갑니다. 딸이 동화 책 서너 권을 펼쳐 놓고 읽고 싶은 것 하나를 고르라고 합니다. <달구지를 끌고> -비룡소-를 골랐더니 딸도 그 책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딸과 함께 낙엽이 흩날리는 10월의 한 농가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얼룩소에 달구지를 매어 놓고 미소 짓는 한 농부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농부는 이제 달구지에 차곡차곡 물건을 싣기 시작합니다.

10월이 되자, 농부는 소를 달구지에 매었어.

4월에 농부가 깎아 두었던 양털 한 자루

농부의 아내가 베틀로 짠 숄.
4월에 농부가 깎은 양틀을 물레에 자아 털실을 만들고,
그것을 베틀에 돌려서 짠 숄이지.

농부의 아내가 자아낸 털실을 가지고 농부의 딸이 짠 벙어리 장갑 다섯 켤레.

농부의 아들이 부엌칼로 깎아 만든 자작나무 빗자루.
. . . . . .  . .
. . . . . . . .

달구지가 가득 차자
농부는 아내와 아들 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어.

그리고 농부는 소를 몰고 열흘 동안 걸어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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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항구 도시 장터에 동착한 농부는 달구지 안에 실은 모든 것과 달구지와 달구지를 끌고 갔던 소와 소의 멍에와 고삐까지 팔았습니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농부는 가족을 위한 선물을 샀습니다. 무쇠 솥과 수예바늘과 주머니 칼과 앵두맛 박하 사탕 2파운드를 샀습니다.  그리고 농부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럴 때 농부의 마음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더니 행복할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딸과 나는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농부처럼 행복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10월이 되면 노랗게 낙엽을 떨굴 은행나무 아래 앉아 있어서 더 행복했습니다.

농부의 딸은 수예바늘을 받아 수를 놓기 시작했고,

농부의 아들은 주머니칼을 받아 나무를 깎기 시작했어.

농부의 아내는 새로 산 솥에다 저녁밥을 지었고,

가족 모두는 앵두맛 박하 사탕을 먹었어.

그리고 농부의 가족은 겨우내 각자의 일을 차분히 했습니다.
3월이 되자, 단풍나무 설탕을 만들었고 4월이 되자, 양털을 깎았고 5월이 되자 감자와 순무와 양배추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6월과 7,8월을 보내고 9월을 지나 10월이 되면 농부는 또 소를 달구지에 맬 것입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를 보내고, 세월은 농부 가족이 먹은 앵두맛 박하사탕처럼 추억의 향기를 남기고 인생 속으로 스며들 겁니다. 이 아름다운 흘러감과 반복을 일곱 살 난 딸이 다 느끼랴마는 나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 우리도 하리 하우스에서 작은 학교를 가꾸며 한 해를 흘려  보내고 또 한 해를 받아들이면서 순리대로 살자꾸나. 커다란  은행나무가 투박한 껍질 속에서 여린 잎을 만들고 열매를 영글게 하고 가을이 되면 노란 잎으로 겨울 잠자리를 마련하듯 우리도 세월을 아름답게 흘려  보내자꾸나 ... ...‘

그림동화 <달구지를 끌고>에는 대화가 한 문장도 없습니다. 그저 서사 (敍事)만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도 지루하지 않게 읽힐 수 있는 건 리듬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구지를 끌고>의 작가 로날드 홀은 시인입니다. 시인이 쓴 동화에는 저도 모르게 잔잔한 음악이 흐릅니다. 시의 운율 (韻律). 번역체 문장이지만 반복과 대구가 만들어내는 운율이 자연스레 흘러나옵니다.

 이 책에서 글이 다 말해 줄 수 없는 부분은 그림작가 바바라 쿠니가 완벽하게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림을 위해 글이 씌어졌는지 글을 위해 그림이 그려졌는지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 책에서 글과 그림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 수록 이 책이 갖고 있는 조화의 미덕에 감동받게 됩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사람들에 대한 찬양. 그 찬양의 한 구절을 하리하우스에서 만들 계획으로 열심히 붓질을 하고 있습니다. 장마가 오기 전에 데크에 오일스테인을 다 칠해야 할텐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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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業報)를 녹여내는 동심(童心) -제랄다와 거인

--옛날에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이 혼자 외로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 잡아 먹는 거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는 날카롭고 수염은 가시처럼 뾰죽뾰죽, 코는 큼지막했어요. 물론, 기다란 칼도 갖고 있었고요. 괴팍스런 서이에, 먹성은 엄청났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요, 아침밥으로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것이었어요. --

<제랄다와 거인>의 첫 페이지엔 이런 글이 나오며 거기에 어울리는 투박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토미 웅거러 그림의 특징인 대충 그린 듯한 테두리 안에서 거인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고, 거인의 뒷 배경은 검게 칠해져 있다.

이런 그림을 보여주며 무서운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것이었어요.’ 하는 부분을 숨죽여 읽는다. 말하자면 겁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둘러보면 표정이 각색인데, 이미 동화책은 책 속의 세상일뿐이란 걸  아는 아이들은 괜히 무서운 척 하기도 하는데, 진짜 공포는 없고 장난기 넘치는 눈빛이다. 우리 딸은 이 부류에 속한다.

만약 우리 아들에게 이런 거인을 만나면 어쩌냐고 묻는다면 뭐라 할지 답이 보인다. 정의에 불타는 훈이 표정을 하고서  ‘내가 로봇으로 변신해서 얍!’ 하고 책 속의 거인에게로 주먹을 날릴 것이다. - 성북 정보도서관에서 상영한 로봇 태권브이를 본 이후로  우리 아이들의 화두는 로봇 태권브이다.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내가 초등학교 때 보았던 로봇 태권브이에 내 아이들이 푹 빠졌다. 왠지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

내가 처음 <제랄다와 거인>을 보고는 좀 당황했었다. 식인 거인이 주인공 이라니, 그것도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식인 거인이라면 아이를 잃은 부모 가슴에 남은 증오와 한은 어쩌라고 하는 생각에서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말하자면 과오가 용서 안 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사람 잡아먹는 거인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인다. 악어 아리게 - < 산을 넘은 아리게> 교원 출판사 - 가 유치원 가방을 메고 악어 유치원에 가는 이야기가 너무 당연하고 거슬리는 것 없듯이 거인이 사람을 잡아먹는 이야기도 단순한 무서움이지 혐오감이 아닌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더니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이해방법의 차이였다. 거인이 아이를 잡아먹는 것은 늑대가 아기 염소를 잡아먹는 것과 같이 그저 잡아먹는  낱말 뜻 그대로 받아들여 이해하는 방법이다. 반면 어른들은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낱말 안에 00살인이니 00살인범이니 하는 경험치가 부가되기 때문에 역겨움과 끔찍함, 잔인함 등의 감정이 압도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지난날에 대한 잊음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원수진 일을 잊지 않고는 결코 거인을 받아들여 줄 수 없음을 어른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제랄다가 만들어 내는 멋진 요리에 있다. 빨주노초파남보 총 천연색으로 치장한 음식들, 다리를 들고 있는 신데렐라 식 칠면조 구이의 발목에 신겨져 있는 빨간 구두를 보는 재미, ‘거인의 기쁨’이라 불리는 과일과 쿠키로 치장한 아이스크림 케이크! 와, 이런 것들을 먹는 거인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작은 여자아이인 제랄다가 저런 요리들을 다 해낼 수 있다니 하는 놀라움과 부러움. 이런 다양한 감정들이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이다. 더구나 해학과 암시가 어우러진 맨 마지막장의 그림 -수염 깎은 거인이 어설프게 웃고 있는 표정에서 아이들은 더 이상 괴물 거인이 아닌 사람 거인을 본다. 그 못생긴 거인의 웃음에서 아이들은 거인에 대한 두려움이나 편견 따위를 아예 잊고 만다.

비록 사람을 잡아먹는 업보(業報)를 운명으로 타고 났을지라도 그래서 그간은 아이들을 여럿 잡아먹었더라도 음식을 잘 하는 어린 여자아이 제랄다를 만나 음식에 대한 새로운 경지를 접하고 더 이상 사람을 잡아먹고 싶은 생각이 싹 없어진 거인을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의 힘이다. 동심(童心)의 용해력(溶解力).

우리 사회가 아니 우리 어른들이 아니 내가 아이들의 이런 용해력을 갖고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 간의 오랜 다툼이나 나라들 사이의 전쟁은 지나간 것들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혀 발생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제랄다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쓰러진 거인에게 음식을 대접 했듯이, 아이들이 거인을 용서 했듯이, 서로 위해주고 용서하고  지난 일을 잊어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물론 거인은 자신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 마을의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용서를 구한다. 동그랗고 빨간 막대사탕은 진실하고 뜨거운 반성과 사죄의 상징이다. 그 사탕을 받아든 아이들은 사람 잡아 먹는 거인을 그냥 큰 사람 , 거인으로 받아들여준다.

누구나 살면서 마음에 쌓이는 잊을 수 없는 아픔이 있고 원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것으로도 녹여지지 않고 한(恨)이 되어 쌓인다. 그런 한(恨)의 되풀이가 불교 용어로 업보(業報)가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사람을 잡아먹어야만 하는 업보(業報)를 타고난 거인.

그 거인의 업보를 벗겨준 것은 다름 아닌 음식보시(飮食布施)였다. 먹을 것을 베푸는 것. 제랄다의 정성어린 음식 맛은 너무도 기가 막혀 사람 잡아먹는 업보를 녹여주었다. 내가 누군가의 음식을 준비할 때 나의 요리가 먹는 사람의 업(嶪)을 소멸시킬 수 있다면 어라나 큰 기쁨일까, 행복일까!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후엔 아이들과 요리를 해야 한다. 제랄다처럼. 아주 간단한 요리도 아이들은 즐거워한다. ‘너희가 제랄다라고 생각해봐.’라고 말해주면 더 좋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요리 중 감자 삶기가 간단하고도 좋다. 거인이 식은 감자를 먹으며 투덜거리는 장면이 나오는 데 따뜻한 감자요리를 만들어 주자고 연결시켜 말해주면 더 진지해 진다.

칼은 위험하니 피하고 가정용 필러기로 감자를 깎으라고 한다. 너무 큰 감자는 반 썰어서 삶는데 이때 케이크에 따라오는 플라스틱 빵칼을 주고 톱질하듯이 썰어보게 하는 것도 좋다. 물론 박을 타는 흥부처럼 슬근슬근 썰어보자는 말도 잊지 말고.

감자가 잠길 정도의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삶으면 더 맛있다. 감자의 칼륨 성분이 소금의 배설을 돕기 때문에 감자와 소금은 원래 궁합이 잘 맞는다.

젓가락으로 찔러보아 막힘 없이 쑥 들어가면 익은 것인데, 아이들 스스로 찔러보아 익지 않았을 때와 익었을 때의 느낌을 손으로 느끼게 해준다.

잘 익었으면 꺼내서 예쁜 접시에 담아 먹는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요리이므로 접시가 화려하고 예쁠수록 좋다. 보기 좋은 떡을 만드는 것이다.

먹으면서 ‘이렇게 맛있는 감자를 거인이 먹으면 사람 잡아 먹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시겠네.’라고 칭찬해주면 기분 짱!

내가 직접 만든 감자 요리와 패스트푸드의 감자 튀김의 차이점과 공통점 찾기 놀이를 하는 것도 재미있다. 논술은 멀리 있지 않다. 이렇게 놀며 먹으며 차이점과 공통점을 찾고 얘기하다 보면 논리력도 저절로 키워지고 발표의 기쁨도 저절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 그림동화는 종합예술이다. 그림이면 그림, 내용이면 내용. 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더구나 그림과 내용이 상호상승작용을 하여 서로를 더 빛나게 한다.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섭렵하게 된 그림동화를 통해서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워졌다. ‘그림동화를 읽는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진정 어른들 자신을 위해 읽는 것이다.

그림동화.  그 보고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앞으로 그림동화와 연계되는 체험학습 ( 유아 - 초등학생과 동참을 원하는 그의 부모님) 을 하리 하우스의 체험마당에서 열 계획입니다. 하리 하우스가 가능한 공간이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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