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사람> <달님 안녕!>과 함께 하는 달맞이

나는 평소에도 송편을 자주 하는 편이다. 쑥과 쌀을 섞어 빻은 가루를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아이들 간식거리가 없을 때 꺼내서 송편을 한다. 송편 소는 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깨와 설탕을 넣고 하는 깨 송편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강낭콩을 통째로 넣고 하는 콩 송편이 싫어서 어떻게 하면 밤이 들은 송편을 골라 먹을까를 고심했는데, 우리 아이들은 밤 송편이 나오면 엄마가 제발  좀 먹어 달라 하고 깨 송편이 나오면 좋다고 먹는다. 깨는 늘 있는 양념이라 송편 소로 넣기가 좋고 또 단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단 맛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어서 좋다. 이번 추석에도 송편을 만들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나만의 개성있는 송편 만들기가 아이들 즐거움이다. 그러나 차츰 추석이라고 송편을 만드는 집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얼마 먹지도 않는 것 많이 해서 하느라고 고생하! 고, 안 먹고 남은 것 은 처치곤란이라 고생. 그러니 아예 먹을 만큼 사서 맛있게 먹고 남는 음식 없게 하자는 것이 송편을 사는 이유,  그 합리성을 비난할 이유가 없다.

그래도 추석인데 뭔가 1% 부족하다 싶은 마음을 책으로 채워보는 건 어떨까? 바로 그림책 <달사람> - 토미 웅거러 작, 비룡소 출판- 이다. 보림 출판사의 <달님 안녕!>도 좋다.


콩닥콩닥 절구에 방아를 찧는 토끼도 없고 금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도 달엔 없다. 토끼와 계수나무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일로 인류는 인간 행보의 위대함을 표방했다. 그러나 달 표면에서 휘날리던 인간의 깃발도 달에 대한 흠모의 정마저 날려버리진 못했다. 해마다 추석날 밤이 되면  저녁상이며 조촐한 술상을 정리한 후엔 달님을 찾아 하늘을 본다. 옅으면 옅은 대로, 묽으면 묽은 대로, 구름에 가리면 가린  대로, 크고 환하면 크고 환한 대로 달은 곧 ‘님’이 되어 가슴으로 마주치게 된다.

때론 이론 욕심 다 내면 안 되지 싶을 만큼 많이 읊조리고 때론 한 가지 말만 간절히 전한다. 다분히 비이성적인 달님과의 교감이 헛헛하거나 비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달님을 향한  발원의 내용이 이기적이지 않기 때문일 거다. 달님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내용은 ‘내가’보다 ‘누가’에 대한 것들이 더 많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 보다 ‘누가 어떻게’ 라고 하게 된다. 그리하여 달님을 향한 기도는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환원되어 돌아온다. 그 사랑으로 추석날 달맞이는 유지되는 것이리라.


비룡소 그림동화 <달사람>은 달에 대한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 준다. 바로 달에 사는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다.

투명하고 물렁물렁하고 동그라미 안에 착 구부리고 들어앉아 지구를 내려다보는 달사람. 그는 밝은 불빛아래서 음악을 연주하고 춤추며 노는 지구인들처럼 놀아보고 싶어서 유성 꼬리를 붙들고 지구로 왔다. 그러나 지구 사람과 다른 모습 때문에 철창에 갇히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우주선을 타고 다시 달로 돌아가게 된다. 이제 달사람은 지구인들의 무도회를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고 달에 머물러 있다.

<달사람>을 읽은 아이들은 달님을 보며 달사람의 윤곽을 찾을지도 모른다. 저긴 둥그런 얼굴, 저긴 위로 구부린 다리, 저긴 동그란 달 안에 구겨 넣은 팔...

그런 모습의 달사람에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지 않는다. 다만 반가운 친구를 부르듯 큰 소리로 부르며 인사할 것이다.

“달사람, 안녕! 안녕하세요?”


보림 출판사의 <달님 안녕!>은 푸른 밤하늘과 노란 달 그리고 고양이와 집과 엄마와 아이의 검은 실루엣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마치 그림자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구조를 갖추고 있어 이야기 전개에 따른 긴장과 이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물론 책을 읽어주는 사람의 실감나는 표정과 목소리 연기가 뒷받침 되어야 그 감정의 흐름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아들에게 <달님 안녕!>을 읽어 줄 때는 목소리 연기하듯 열심히 읽어야 한다.


추석이나 정월 대보름날, 달님을 외경의 눈으로 보고 싶지 않다면 아이와 함께 <달사람>과 <달님 안녕!>을 읽고 친구를 만나는 마음으로 달맞이를 나서도 좋을 일이다. 마당 끝이나 골목길이나, 아니면 베란다 창문을 열고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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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의 거미줄>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내 아이는 나의 거울이다. 내가 바로 해야 내 아이도 바로 할 수 있다. 내가 웃어야 아이도 웃는다. 아이가 감동 깊게 책을 읽게 하고 싶다면 내가 책을 읽고 감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샬롯의 거미줄>을 읽게 하고 싶다면 내가 샬롯의 거미줄을 재미있게 읽으면 된다.

애들 책을 어른이 읽어서 뭐 감동스럽겠냐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천만의 말씀. 어덜 땐 아이들이 이걸 이해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깊은 이야기가 나온다. 때론 어른인 나를 깨우치는 내용이 나오고 때론 나를 울게 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너무 아름다운 표현이 나와서 메모를 하게도 하고 작가들의 삶의 철학이 베어나는 깊이를 느끼게 하는 책들도 있다. 아이들 책을 부모가 같이 읽는 것은 절대 시간낭비가 아니다. 민사고를 어떻게 보내냐는 둥 과고를 보내려면 초등학교시절부터 어떻게 학습시켜야 한다는 둥의 내용의 책을 불을 켜고 볼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읽다 말은 동화를 같이 읽고 엄마가 읽어 봤더니 정말 재밌더라는 동류의식을 느끼게 하는 말 한마디가 아이를 진정한 독서의 길로 가게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아이와 함께 부모의 마음도 크는 것이리라.

-윌버는 이 끔찍한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


<샬롯의 거미줄>의 한 부분이다. 끔찍한 외로움. 작가는 윌버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과연 아이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아이들도 가끔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이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심심함이나 지루하다는 감정의 적극적인 표현일 수 있다. 반면 어른이 느끼는 외로움은 상실이나 허무함을 동반한 괴로움일 수 있다. 아이와 부모가 서로 이해 할 수 없는 감정을 한번 섞어 본다면 혹시 윌버가 느끼는 외로움을 제대로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감저의 교류를 통해 부모는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는 부모를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런 마음으로 샬롯의 다음 대화를 읽으면 윌버와 샬롯의 만남이 얼마나 극적이고 진실한 것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극적’ 요소와 ‘진실’의 만남으로 <샬롯! 의 거미줄>은 정교하게 짜여있다.


-친구를 원하니, 윌버? 내가 내 친구가 되어 줄게.-

윌버와 샬롯은 그렇게 만났다.


샬롯은 그렇게 윌버에게 다가갔다. 아무 조건도 없이 한 영혼이 한 영혼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래서 샬롯은  윌버를 위해 엄청난 일을 벌이게 된다.  신비로운 우정의 힘!


-윌버는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나는 근사하지 않아, 샬롯. 난 그냥 보통 돼지야.”

샬롯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나한테는 네가 근사한 돼지야. 바로 그게 중요한 거야. 너는 나의 가장 친한 벗이고, 나한테는 네가 놀라워.”


-윌버는 우정이 세상에서 가장 가슴 뿌듯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맞다. 나이 들수록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친구라 하지 않던가. 나이가 들고 외로움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윌버의 마음에 동감을 표할 것이다. 오늘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말해보는 거다.

“윌버가 그러는데, 세상에서 가장 가슴 뿌듯한 것이 우정이래....”


<샬롯의 거미줄>의 작가는 아마도 거미를 오래 관찰한 사람일 것이다. 거미의 몸놀림을 표현하는 부분이 그렇고 거미의 부화를 얘기하는 부분이 그런 오랜 관찰을 느끼게 한다.


-윌버는 겨울이 끝나고 새끼 거미들이 나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무언가 일어나거나 부화되기를 기다릴 때에, 삶은 언제나 풍요롭고 차분한 시간이 된다.


-새끼 거미들은 따뜻한 상승기류를 느꼈다. 그 거미는 거꾸로 서서, 방적돌기를 공중으로 향하게 하더니, 고운 비단실을 구름처럼 뽑아 냈다. 그 비단실은 풍선이 되었다. 윌버가 지켜보는 가운데, 새끼 거미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거미들의 부화를 따뜻한 가슴으로 바라보며 숨죽이고 앉아있을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샬롯의 거미줄>에서 흥미로운 것은 샬롯이 윌버에게 간단명료하게 단어의 뜻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다. 아마 샬롯은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언어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필생의 역작’ 이니 ‘가엾은 대물림’ 이니 ‘다재다능하다’ 와 같은 말을 넣어 짧은 글짓기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아니면 아예 사전찾기 놀이를 해도 되고. 아직 우리 아이들은 한글도 못 뗀 처지라 사전찾기나 짦은 글짓기를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움이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커서 <샬롯의 거미줄>을 읽게 되면 짧은 글짓기와 사전에서 단어 찾기 놀이를 꼭 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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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 조지 마법의 약을 만들다. 마틸다. 찰리와 초콜릿 ~


작가 로알드 달의 상상력이 던지는 물음.

"당신은 당신의 부모를 없애버리고 싶지 않나요? "

뭐 애들 보는 동화 이야기에 황당한 물음이냐고요?

그렇게 황당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조지, 마법의 약을 만들다>입니다. 물론 마법약 때문이지요.

여덟 살 난 조지와 조지의 엄마, 그리고 조지 아빠인 크랭크 씨와 조지에게 마귀할멈 같이보이는 외할머니. 이 네 사람을 통해 작가는 귀찮고 성가신 존재인 한 늙은이를 마법으로 뽕 사라지게 만듭니다. 보통 할머니라는 말에서 느끼는 긍정적이고 전형적 요소는 편안함과 부드러움 자상함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조지의 외할머니는 아이에게 공포심을 조장하는 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악마구리처럼 자신의 약 시간을 챙기는 겁나는 할머니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결국 할머니 옆에 붙어서 할머니 약 시중을 들어야 하는 조지는 ‘강력하고 지독하고 끝내주는 약효를 갖고 있어서 할머니의 병을 완전히 고치거나 아니면 할머니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마법의 약을 만들기로 한다.

그 약은 온갖 욕실용 세제와 화장품과 엔진오일과 가축들의 약을 비롯해 부엌의 온갖 양념들을 쏟아 넣어 끓인 것이다. 조지는 할머니가 약을 드시는 시간에 할머니의 입에 자신이 만든 마법의 약을 넣어 드린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할머니의 몸이 점점 커지더니 지붕을 뚫고 나갈 정도로 커진 것이다. 조지 아바 크랭크 씨는 그 마법의 약을 자신의 가축들에게 먹여 가축들이 집채만큼 커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똑같은 약을 만들어 팔아 부자가 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조지의 기억을 더듬어 다시 만든 약은 몸을 커지게 하는 약이 아니라 줄어들게 하는 약이 되고 말았다. 크랭크 씨가 들고 있는 줄어드는 약을 할머니가 낚아채어 걸신들린 듯 한입에 먹어치우고 결국 할머니는 점점 몸이 줄어 병아리 만해졌다가 씨앗 만해 졌다가 아예 먼지처럼 작아져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장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황에서 크랭크씨는 ‘만세!’하고 외친다. 잠시 당황해하던 조지의 엄마도

-어머니가 집안의 골칫거리긴 했죠.-

라고 말한다.

-물론 장모님은 확실히 그랬어.-

확실히 골칫거리였던 대상을 마법으로 사라지게 만든 로알드 달은 그 방법이 마법이었기 때문에 세속의 비난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인력이 아닌 마법이었으니까.

작가 로알드 달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제가 되고 있는 노인문제를 노골적이고 상스럽게 뻥 터뜨리고 있다. 마치 주머니를 뒤집어 묵은 먼지를 탈탈 털어내듯 마법으로 노인 문제를 해소했다. 그러나 거기엔 비난이나 자책이 없다. 왜냐하면 그건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이 아니면 풀 수 없는 과제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로알드 달의 또 다른 동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도 나이든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이 나온다. 왜 ‘들’이냐 하면 찰리의 친조부모와 외조부모가 동시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노인들 역시 조지의 할머니처럼 가난하고 무능하다. 한 침대에 발을 맞대고 마주 누워 있는 네 노인들은 경제적으로 찰리 부모님의 짐인 것이 확실하다. 그런 네 명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부모님, 그 틈에서 자라는 찰리는 너무나 배가 고프다. 그런 찰리에게 초콜릿은 하나의 상징이다. 배부름과 풍요의 상징 초콜릿. 결국 찰리 가족은 풍요를 누리게 되는 데 그건 바로 가족간의 사랑에 기인한다. 윗세대와 아랫세대가  서로 위하고 양보하고 배려하기 때문에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해피엔딩이다. 로알드 달은 <조지, 마법의 약을 만들다>의 인물들과 반대되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인물들에게 행운을 부여함으로써 더 긍정적인 가족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외손주와 사위가 합세하여 한 노인을 이 세상에서 뿅 사라지게 하는 <조지, 마법의 약을 만들다>가 ‘효이데올로기’가 강건하게 버티고 있는 우리 초등교육에서  어째 버젓이 권장도서목록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 <마틸다>와 <내 친구 꼬마 거인> <제임스와 슈퍼 복숭아> 등을 통해 얻은 그의 명성 때문인 것 같다. 아니면 <마법>이란 단어가 주는 면죄부 때문일 수도 있고.

괴력의 소유자며 인격 파탄자인, 알고 보니 살인자이기도 한 중년의 여성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 학습에 천재적인 소녀 마틸다가 다닌다. 마틸다의 천재성을 알아본 담임 선생님과 마틸다가 초능력의 힘으로 폭력 교장을 몰아내는 이야기가 <마틸다>이다. 반전의 미와 함께 부당한 폭력에 대항하는 인간의 자존심은  초능력까지 불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설정으로 읽는 내내 흥미와 환희를 느끼게 한다. 특히 교장선생님이 먹을 케잌 한조각을 몰래 먹었다는 이유로 케잌 한 개를 통째로 먹어야 하는 벌을 받은 아이가 전교생의 보이지 않는 응원을 받으며 케익 하나를 다 먹어내는 장면은 억눌린 경험이 있는 아이들의 감정을 한방에 날려 보낼 만큼 신나는 일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마틸다>를 손에 잡으면 한번에 다 읽어 치우고 만다. 제 속이 시원해지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리라.

<마틸다>를 이야기 하다보면 자연스레 학교에서 처벌받았던 일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옮아간다. 그러면 제각각 할말이 많아진다. 간혹 억울하다는 표현을 쓰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어서 ‘그럴 땐 다시 한 번 잘 말씀드리지 그랬니.’ 라고 말해주는데, 아이 대답은 ‘그러면 더 혼나요.’ 한다. 바로 말대답하는 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을 해명할 기회를 얼마나 갖게 될까. 때론 용기가 없어서, 때론 미리 포기 해서 때론 말하기 치사해서 자신을 정당하게 해명할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경우가 있다. 특히 ‘어른’이라는 명찰만 달면 자신보다 나어린 사람의 해명을  ‘말대꾸’라고 묵살해 버리는 권위적 분위기가 많은 우리사회에서, 그 사회안에 있는 학교에서 자신을 위한 해명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집단이 느끼는 감정은 단절감이 아닐까. 소통의 문이 없는 공간에서 느끼는 단절감은 무력감이나 공포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를 무서워하게 되고, 때론 관계를 부정하게 된다.

그림책 <지각대장 존>-비룡소- 은 선생님과 학생사이의 소통의 단절에 대한 이야기를 재치있게 풀어낸 존 버닝햄의 작품이다. 학교생활이나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지각대장 존>은 학생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꺼리로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건 ‘멋진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빼먹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마틸다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담임 선생님과 <하늘을 나는 교실>에 나오는 선생님 이야기도 함께 나눈다면 아이들 마음 속에 존경하는 선생님이 떠오르고 사제간의 아름다운 추억도 들추어 낼 수 있으리라.

다시 로알드 달로 돌아오자. 그의 상상력엔 도덕의 잣대가 소용 없다. 초콜릿 공장을 돌며 아이들 하나하나가 사고로 사라지지만 로알드 달의 그저 신명나는 풍자시 한 가락으로 마무리 하고 만다. 그의 작품의 특징인 풍자는 가락-운율-을 얻어 더 신명나는 데 <내 친구 꼬마 거인>에서도 말은 가락을 얻는다.  그의 작품 속 풍자시들에 가락을 붙여 보는 놀이도 아이들과 같이 하면 재미있겠다.

문득 상상력이 거침 없던 로알드 달의 삶이 실제로도 거침없었는지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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