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학교/책만끽학교'에 해당되는 글 43건

  1. 2007/06/23 달구지를 끌고
  2. 2007/05/22 삼중당 문고에서 시공주니어까지
  3. 2007/03/29 삶 속에 스며드는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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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지를 끌고

 하리 하우스 방부목 데크에 오일스테인을 칠하고 있는데, 딸이 와서 조릅니다.

 “엄마, 책 하나만 읽어 줄 수 있어?”
 “엄마 지금 바쁘잖아.”
 “엄마, 딱 하나만 읽어 주고 하면 되잖아요.”

 저희끼리 한참을 잘 놀더니 일하는 엄마에게 자꾸 조릅니다.

 사실 이럴 땐 눈 딱 감고 책 읽어 줘야 한다는 얘기를 강남엄마 얘긴지 목동 엄마 특목고 보낸 얘긴 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설거지 하다가도 고무장갑을 벗고 읽어 줬단 이야기였습니다. 그럴 수 있는 환경이라면 참 좋은 얘기긴 한데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엄마 설거지 다 하고 읽어 줄게.”
 “조금만 기다려, 빨래 요것만 다하고 읽어 줄게.”

 심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지금 일하는 거 안보여!” (소리 꽥!)

 그냥 보내려다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래, 그동안 잘 놀았으니까 한 권만 읽어 줄게.”

 선심 쓰듯 이야기 합니다. 엄마를 뒤에 달고 가는 딸의 발걸음이 너무 가볍습니다.

 딸과 함께 돗자리를 깔아 논 은행나무 밑으로 갑니다. 딸이 동화 책 서너 권을 펼쳐 놓고 읽고 싶은 것 하나를 고르라고 합니다. <달구지를 끌고> -비룡소-를 골랐더니 딸도 그 책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딸과 함께 낙엽이 흩날리는 10월의 한 농가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얼룩소에 달구지를 매어 놓고 미소 짓는 한 농부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농부는 이제 달구지에 차곡차곡 물건을 싣기 시작합니다.

10월이 되자, 농부는 소를 달구지에 매었어.

4월에 농부가 깎아 두었던 양털 한 자루

농부의 아내가 베틀로 짠 숄.
4월에 농부가 깎은 양틀을 물레에 자아 털실을 만들고,
그것을 베틀에 돌려서 짠 숄이지.

농부의 아내가 자아낸 털실을 가지고 농부의 딸이 짠 벙어리 장갑 다섯 켤레.

농부의 아들이 부엌칼로 깎아 만든 자작나무 빗자루.
. . . . . .  . .
. . . . . . . .

달구지가 가득 차자
농부는 아내와 아들 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어.

그리고 농부는 소를 몰고 열흘 동안 걸어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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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항구 도시 장터에 동착한 농부는 달구지 안에 실은 모든 것과 달구지와 달구지를 끌고 갔던 소와 소의 멍에와 고삐까지 팔았습니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농부는 가족을 위한 선물을 샀습니다. 무쇠 솥과 수예바늘과 주머니 칼과 앵두맛 박하 사탕 2파운드를 샀습니다.  그리고 농부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럴 때 농부의 마음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더니 행복할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딸과 나는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농부처럼 행복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10월이 되면 노랗게 낙엽을 떨굴 은행나무 아래 앉아 있어서 더 행복했습니다.

농부의 딸은 수예바늘을 받아 수를 놓기 시작했고,

농부의 아들은 주머니칼을 받아 나무를 깎기 시작했어.

농부의 아내는 새로 산 솥에다 저녁밥을 지었고,

가족 모두는 앵두맛 박하 사탕을 먹었어.

그리고 농부의 가족은 겨우내 각자의 일을 차분히 했습니다.
3월이 되자, 단풍나무 설탕을 만들었고 4월이 되자, 양털을 깎았고 5월이 되자 감자와 순무와 양배추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6월과 7,8월을 보내고 9월을 지나 10월이 되면 농부는 또 소를 달구지에 맬 것입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를 보내고, 세월은 농부 가족이 먹은 앵두맛 박하사탕처럼 추억의 향기를 남기고 인생 속으로 스며들 겁니다. 이 아름다운 흘러감과 반복을 일곱 살 난 딸이 다 느끼랴마는 나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 우리도 하리 하우스에서 작은 학교를 가꾸며 한 해를 흘려  보내고 또 한 해를 받아들이면서 순리대로 살자꾸나. 커다란  은행나무가 투박한 껍질 속에서 여린 잎을 만들고 열매를 영글게 하고 가을이 되면 노란 잎으로 겨울 잠자리를 마련하듯 우리도 세월을 아름답게 흘려  보내자꾸나 ... ...‘

그림동화 <달구지를 끌고>에는 대화가 한 문장도 없습니다. 그저 서사 (敍事)만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도 지루하지 않게 읽힐 수 있는 건 리듬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구지를 끌고>의 작가 로날드 홀은 시인입니다. 시인이 쓴 동화에는 저도 모르게 잔잔한 음악이 흐릅니다. 시의 운율 (韻律). 번역체 문장이지만 반복과 대구가 만들어내는 운율이 자연스레 흘러나옵니다.

 이 책에서 글이 다 말해 줄 수 없는 부분은 그림작가 바바라 쿠니가 완벽하게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림을 위해 글이 씌어졌는지 글을 위해 그림이 그려졌는지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 책에서 글과 그림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 수록 이 책이 갖고 있는 조화의 미덕에 감동받게 됩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사람들에 대한 찬양. 그 찬양의 한 구절을 하리하우스에서 만들 계획으로 열심히 붓질을 하고 있습니다. 장마가 오기 전에 데크에 오일스테인을 다 칠해야 할텐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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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리드 린드드랜과 에리히 케스트너의 작품들



내가 처음으로 삼중당문고를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 심 훈 의 상록수를 읽으면서였다. 국어 선생님께서 --승명자 선생님! 어디 계세요? 인도로 교회 개척사업 가셨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는데 그 후론 알 수가 없습니다. 제게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사랑의 씨를 뿌려주신 분이랍니다. 혹시 소식을 알고 계신분은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을 만나면 그저 따뜻하게 꼭 안아 드리고 싶습니다. 가나 초콜릿을 유난히 좋아 하셨던 선생님, 뵙고 싶습니다. -- 독후감 숙제로 내 주셔서 읽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 때 느꼈던 책읽는 기쁨이 가슴을 파고 든다. 상록수 이후 이광수의 책을 읽었다. 유정, 무정, 흙, 사랑. 이후 난 학교 앞 분식집에서 파는 햄버거보다 책방에 꽂혀있는 삼중당문고를 더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한 삼중당문고에 대한 사랑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이어졌다. 한 때 내 희망은 삼중당문고 전권을 내 책장에 꽂아놓는 거였다. 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지 못했다. 삼중당 문고에 대한 꿈을 다 이루기 전에 다른 잡다한 책들에로 관심이 옳아갔기 때문이다.


지윤이 지승이 책 때문에 꽂을 자리가 없어져서 어른들 책은 박스에 싸 놓았는데, 이제 하리하우스가 완성되면 어떻게든 책꽂이를 마련해서 나의 삼중당문고도 꽂아놓고 싶다. 같은 시대의 추억을 지닌 벗이 오면 한 권 뽑아 주리라. 금수산 산자락 밑에서 읽으라고.


아마도 전집을 좋아하는 것이 내 성향인가 보다. 얼마 전에 시공주니어 베스트문고 50을 구했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물론 내가 먼저 읽어야 이야기가 통하므로 난 더 열심히 읽고 있다. 오늘로서 30권을 읽었다. 빨리 나머지 20권도 읽고 싶은 욕심에 -너무 재미있어서- 그 전에 읽던 반지의 제왕도 5권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나를 부르고 있지만 잠시 기다리라 하는 수밖에.



1.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아스트리드 린드그랜 지음


오늘은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를 읽었다.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뒤죽박죽 별장에 살고 있는 삐삐의 원작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라스무스와 폰투스> 라는 작품을  읽으면서도 작가의 유머감각에 반했는데, 역시 거칠 것 없는 삐삐의 입을 통해 나오는 유머가 책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밥도 안 해도 되고, 빨래도 안 해도 되고, 청소도 안 해도 되고 애들도 안 챙겨도 되는 날이 한 일주일만 된다면 -그런 날이 주부들에게 주어지는 휴가일 텐데, 아무래도 너무 욕심이 크지?  - 나머지 20권을 후딱 읽어 치울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아이들 돌보고 틈틈이 읽는 재미가 더 감칠맛 나고 좋기도 하다. 이제 애들이 유치원에서 올 시간이다. 마중 나가야지.


생각난 김에 마저 읽지 못한 삼중당문고 시리즈를 헌책방 세원북에서 찾아봐야겠다. 지금은 그 시절 삼중당 문고는 교보에도 없으므로...





2. <하늘을 나는 교실> <내가 어렸을 적에> -에리히 케스트너


얼마 전 한 일간신문에서 클래식 음악 평론가에게 인터뷰를 한 내용을 읽었다.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신 분이 바로 자신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표제만 읽고 나는 ‘아 이분의 어머니도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신 분이신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어머니께서 직접 음악을 연주해 주신 것이 아니고 세 번에 걸쳐 클래식 대전집을 사 주셨던 기억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전집은 누나들이 결혼을 하면서 갖고 갔고 그래서 다시 세 번째로 클래식 대전집을 사서 자신에게 주셨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어머니께서 자신에게 베푸셨던 건 클래식 대전집이 아니고 음악에 대한 영감이라고 했다. 물질을 받으며 정신을 읽을 주 아는 아들이었기에 같은 전집을 서 번씩 사 주셨던 어머니의 뜻이 헛되지 않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한 인간의 내면이 성장하는 데 어머니의 존재가 미치는 영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 중의 하나가 <하늘을 나는 교실>이다. 에리히 케스트너라는 독일 작가의 작품인데 학교사회 안에서 빚어지는 청소년들의 우정, 선생님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과 제자에 대한 진정한 사랑, 그리고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갈등과 그 갈등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역시 세계적 작가의 작품답다는 감동과 함께 어른들도 못 읽어 본 사람이 있으면 꼭 읽어 보시라고 하고 싶다. 내 마음이 촉촉하게 젖음과 동시에 아들딸이 이렇게 크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 것 같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있는 겨울방학에 집으로 갈 차비를 보내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마르틴의 엄마가 마르틴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참지 못하고 훌쩍거렸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마르틴처럼 아들의 입장이 아니라 엄마의 입장에서 읽었기 때문에 더 가슴 아팠던 것 같다.


글 속에는 작가의 경험이 여기 저기 녹아있게 마련이다.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했던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였기에 마르틴의 마음과 마르틴 엄마의 마음을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었으리라.


사실 <하늘을 나는 교실>의 -머리말 하나-는 약간 엉뚱하게 시작된다. 동화 작가인 내게 어머니께서 ‘올해에도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못 쓰면 선물을 안 줄 테다.’  하고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나는  8월에도 눈이 보이는 츄크슈피체 산기슭으로 글을 쓰러 와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머리말 하나-의 내용이다. 참 이해가 안 되었다. 다 큰 아들에게 크리스마스에 대한 동화 한 편을 못 쓰면 선물을 주지 않겠다고 선전포고 하는 어머니는 뭐며, 어머니의 선전포고가 무서워 한 여름에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중 인물은 도데체 뭘 의미하는 걸까 하는 의문에 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말하는 마마보이에 대한 언급일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하고 <하늘을 나는 교실>을 덮었는데, 아무튼 어머니 등쌀에 못 이겨 쓴 작품이 너무 아름답다는 거다. 결국 어머니 등쌀이 아들에 대한 관심과 격려의 몫을 단단히 해 낸 것이다.


항상 머리말을 재미있게 쓰는 에리히 케스트너가 그의 가장 빼어난 작품의 머리말에 등장시킨 것이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내가 어렸을 적에>를 읽고 알았다. 에리히 케스트너에게 있어서 어머니란 존재는 바로 문학적 영감의 보고였던 것이다. 케스트너가 작가로서 가지는 상상력과 감수성, 직관력과 판단의 근거는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얻게 된 선물이었다. 그런 선물을 받은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그의 책 <에밀과 탐정들> <에밀과 세 쌍둥이>에서도 보여준다. 아들의 글 속에서 아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 어머니의 모습.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에>를 읽은 후엔 아이들에게 인생을 아름답게 해 줄 영감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하나를 더 갖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있다. 그 어머니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배워간다. 말투와 자잘한  습관, 먹는 것에 대한 기호까지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때론 생존의 차원이 아닌 영혼의 경지에 대한 모범을 어머니를 통해 보기도 한다. 

도덕적 신념이나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어머니를 품고 사는 자식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 그런 아름다운 자식으로서 살아가기를 나는 원한다. 나는 내 어머니를 진정 사랑하고 존경하므로.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쯤 어머니께서 환갑기념으로 동남아를 다녀오신 적이 있다. 그 때 방문한 나라 중 싱가포르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표현 하셨다.


“ 그 나라는 담배꽁초 버려도 벌금이 많데. 얼마나 깨끗하게 잘 해놨는지 몰라. 그 나라를 보니 ‘아하, 솔고개도 잘 가꿔서 사람들이 오도록 만들어야겠다.’ 이런 맘이 들데.”


 그 후로 어머님은 해외여행이라는 걸 한 번도 더 다녀오신 적이 없다. 대신 솔고개 자투리 땅엔 두릅을 심고 산에서 취나물을 한 포기 한 포기 캐다 심어 취나물 밭을 만드셨다. 사람 오는 걸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찾아 손이 오시면 어머닌 두릅을 따 주시고 취나물을 데쳐 나물을 무쳐 주신다. 그리고 그 두릅과 취나물을 팔아 어린이 날 선물로 손주들을 위해 절편을 뽑아다 주신다. 그런 어머니의 손길 자체가 나에겐 영감의 보고이다.


나 또한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간 것 말고는 그 흔한 동남아 한 번을 못 가봤다. 그래도 해외 여행 하는 걸 낙으로 삼는 사람과 비교하여 나의 삶이 짜증스럽지 않은 것은 내 어머니의 신념을 내가 존경하기 때문이다. 내 고장을 아름답게 가꿔서 사람들이 오게 만들어야지 하고 말씀하신 어머니의 마음속엔 가 보시지 못한 미지의 세상마저도 품을 수 있는 기개가 있음을 자랑스러워 하는 딸이기에 나는 해외여행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도 교육적 공간 하나를 잘 가꿔 사람들이 오게 만들어야지 하는 희망 하나를 품게 되었고 이제 그 희망을 ‘작은 학교 이야기’를 통해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내게 희망을 심어 주신 나의 어머니께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 아이들에게 희망을 품게 해 주는 엄마가 되어야지 라고...


어머니를 도와 두릅을 따 본 적이 있다. 그 때 ‘언젠가 두릅에 대한 시를 써야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 떠오른 시 행 하나를 두릅을 먹을 때 마다 생각한다.


-봄 하늘을 똑똑 분질러 따듯

두릅을 딴다. -


봄에 두릅나무는 길쭉한 가시 막대기처럼 일자로 서있고 두릅 순은 그 꼭대기에서 피어난다. 키 크고 메마른 줄기 끝에 피어나는 두릅 새순을 딸 땐 까치발을 하고  서야 할 때도 있는데, 아래서 올려다 본 두릅의 배경은 푸른 하늘이었다. 서정주의 시처럼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기에 좋은 눈부신 봄 하늘. 두릅 몇 송이 따며 바라본 솔고개 봄 하늘에 대한 추억이 가슴 저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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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도서관에서 ,<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 - 재미마주 - 권윤덕 지음> 라는 책을 아이와 읽었다.  그림도 좋고 내용도 좋았는데, 특히 옷을 물려 입는 내용에서는 내가 더 좋았다.  옷을 물려 입는 것이 우리집 아이들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물려 입는 다는 것을 자연스레 말해 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책을 읽으며 아이와 함께 해 볼 내용을 정했는데, 책과 생활의 자연스런 고리를 만들기 위해 내가 슬쩍 술수를 부리는 것이다.

"  집에 가서 우리도 우리 옷 한 번 그려 볼까?  맞아, 집에 가서 한복 꺼내 줄게 입고 놀아."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비디오 보느라고 그랬나 보다. 오늘은 꼭 한복 꺼내 줘야겠다.

지난 번엔 아이들을 태권도 학원에 보내려고 말을 꺼냈다. 실은 꼬셨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다. 하나는 태권도 학원을 가겠다고 하고 하나는 안 가겠다고 하니, 안 가겠다고 하는 아이를 이런 저런 말로 꼬셨는데, 넘어가지 않았다. 자기는 태권도 학원 안 가고 그냥 유치원만 다니다가 곧장 과학자가 되겠단다. 그랬더니 태권도 학원 가고 싶은 딸이 내 대신 아들을 설득하는데 말이 이랬다.

"지승아, 옛날에 뉴튼이라는 과학자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 나무로 만드는 걸 잘 했대. 그래도 과학자가 됐으니까 너도 태권도를 배워도 과학자가 될 수 있어. "

처음엔 뭔 얘긴가 했는데 뉴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였다. 어렸을 때 어려운 환경에서 외로움을 달래고 정성을 들일 수 있는 일로 나무 공예를 했던 뉴턴의 이야기를 과학자가 될 것이므로 태권도를 배우지 않겠다고 하는 동생을 설득하는 근거로 내세운 것이였다. 그것 말 되네.  그런 생각을 해낸 딸이 얼마나 기특했는지 잘 생각했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물론 아들은 그 논리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책과 생활을 연결 지어 생각하고 말하고 실천한 나의 교육이 아이에게 자연스레 스며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앞으로도 아이들과 책을 매게로 더 많은 활동을 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번에도 말했듯이 나는 위인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전 하리 하우스로 옮기기 위해 다 포장을 해 놓았다. 잔다르크를 불에 태워 죽였던 시대의 억지 논리를 아이들에게 말해 준다는 것은 이 세상은 온통 나쁜 사람들로 우글거린다는  얘기를 하는 것 만큼이나 하기 싫은 얘기인 것이다. 그래도 뉴턴의 만류인력의 법칙이란 말을 기억하지 못해도 과학자 뉴턴의 이야기는 내 아이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으니 기쁘다.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히며 범하기 쉬운 오류가 바로 그 사람들이 어떤 역사적 사실과 관련 있는 가를 외우게 하는 것이며, 너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은근히 부담주고 종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위인전 속의 인물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위인전은 한 사람의 살아 간 <이야기> 이며, 구체적 시대와 배경이 있는 <동화> 정도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좋다.  동화를 읽고 나선 동화 속 주인공처럼 되라는 부담을 주진 않으니까. 부담 없는 위인전 읽기. 나아가  독후감 같은 것 써야 하는 부담이 없는 책읽기가 우리 아이들 마음을 살지게 하리라 생각한다.

책과 생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교육. 생활 속에서 책의 내용을 체험 해 보는 기회를  주는 교육. 그런 살아 있는 교육을 나의 작은 학교 이야기에서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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