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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19 개를 키우고 싶어요! - 내 친구 윈딕시 외 3편


개를 키우고 싶어요!

<내 친구 윈딕시>  <아주 작은 개 치키티토>  <라스무스와 폰투스> <내 친구 커트니>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한 번쯤은 개에 대한 열망을 품는 것 같다. 거리에서 줄에 묶이지 않은 개를 만나면 은연중에 경계를 하게 되는데, 이는 도시화된 개의 폭력성이 보이지 않게 행인들에게 위압감을 주기 때문이리라. 옆집 개도 아니고 뒷집 개도 아닌 정체성 없는 개가 주는 공포는 ‘광견병’이라는 이름 때문에 섬뜩함을 더한다.


그런데, 슈퍼마켓에 들어와 난리를 피우는 덩치 큰 개를 한 여자아이가 자기 개라며 겁도 없이 집으로 데리고 온다. 물론 개를 위한 갑작스런 선택이었다. 그 후로 그 개와 한 소녀와의 우정이 시작되고 그 개를 인연으로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가 <내 친구 윈딕시>다. 이 책을 읽고나면 개털 알레르기 같은 것 무시하고 내 딸에게 개를 한 마리 사 줄까 하는 마음이 살짝 든다.


<아주 작은 개 치키티토>를 부모의 입장에서 읽으면 ‘그래 이렇게까지 원하는 데 한 마리 사주자.’하는 결심이 막 서려고 한다. 개털로 인한 알레르기보다 정서 불안정이 더 큰 문제지 하며 아이 손을 잡고 애견센터로 갈지도 모른다.


<라스무스와 폰투스>의 주인공인 두 소년이 개 한 마리의 목숨을 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도둑들에 대항하는 모험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 역시 개가 아이들에게는 ‘개’ 이상의 무엇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위의 세 책을 모두 읽은 후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개를 키우게 해 준 건 아니다. 다만 아이들에게는 분수처럼 솟구치는 살아 움직이는 것에 대한 열정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 열정의 대상으로 가장 적당한 것이 바로 ‘강아지’라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를 키우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를 설명할 때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사람에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 주어진 것 같다. 그래서 자식들을 다 떠나보내고 남은 노부부들 중에 후손들에게 쏟고 남은 여분의 사랑을 개를 키우는 데 쏟는가 보다.

형제자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소비되어야 할 사랑을 쏟을 곳 없이 혼자 크는 아이들은 자신 안에서 넘치는 사랑을 ‘독점’이라는 형식으로 분출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이  독점에 대한 욕구가 역으로  ‘왕따’를 만드는 게 아닐까. 옛날에 형제가 대여섯 적어도 서넛이 되던 시절엔 형제들끼리의 갈등도 해결하기 벅찼으므로 굳이 친구관계에서 애정의 서열이나 우위를 가릴 틈이 없었다. 그러니 그때는 지금처럼 친구관계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고 그러니 친구를 따돌릴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형제자매 없이 혼자 크는 아이가 늘고, 그런 경우 자신 안에 넘치는 친구에 대한 열정을 역으로 다른 친구를 따돌림으로써 해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보다 친구를 따돌리는 아이에게 다듬어지지 않은 사랑을 쏟을 대상으로 사랑스런 개 한 마리를! 안겨줘 보는 건 어떨까. 넘치는 사랑을 받을 때 보다 정신없이 사랑을 쏟으면서 얻는 게 더 많은 법이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개를 키우기 힘든 경우 <내 친구 커트니> -존 버닝햄. 비룡소-를 함께 읽으며 개에 대한 환상적이고 아련한 추억하나 만들어 주면 어떨까, 어느 순간이고 우리 가족을 지켜 줄 수호천사로서의 커트니. 개를 사달라고 조를 때마다 <내 친구 커트니>를 읽어주면 자연스레 마음속에 커트니를 키우게 될 것 같다.

아이가 애완동물을 간절히 원할 때 가만 생각해 보자. 우리 아이 마음에 나는 얼마만한 키로 자라있는 지를. 아이를 더 많이 안아 주고 손잡아 주고 바라봐 주고, 반대로 아이가 부모를 안아볼 기회를 주고 손잡을 시간을 주고 바라볼 여유를 주는 것이 서로의 마음에서 서로를 키우는 방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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