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미학! 受容美學!

열네 살에 <어린왕자>를 읽었습니다.

그 후로 한 30년 동안에 열네 살에 만났던 어린왕자를 참 많이도 우려먹으며 살았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볼 때도, 코끼리를 먹은 뱀을 생각할 때도, 여우를 생각할 때도, 장미를 볼 때도, 시간 약속을 해 논 기쁨을 표현할 때도 열네 살의 추억 속에서 어린왕자가 걸어 나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린왕자는 순수의 상징으로 우정의 대명사로 사막의 우물처럼 귀하게 살아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딸이 어린왕자를 뽑아 드는 걸 보았습니다. 딸은 여느 동화책처럼 어린왕자를 후딱 읽어치웠습니다. 그리고 딸이 하는 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재미도 없고.’

순수의 상징으로 맑음의 대변자로 어른들을 질책하는 어린왕자를 역시 순수하고 맑디맑기 그지없는 내 딸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모순입니다. 그래서 어린왕자를 다시 읽었습니다. 순수가 순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어린왕자와 내 딸 사이에 장벽으로 있는 걸까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아! 역시나 <어린왕자>는 아름다운 동화였습니다. 그런데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습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 그러니 열 살 난 딸에겐 당연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재미 없는’ 동화였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만약 <어린왕자>를 읽고 너무 재미있다고 하는 열 살짜리 어린이가 있다면 분명 그 어린이의 정신세계는 한 서른 쯤, 아님 한 마흔쯤에 가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혹시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아이라서 사막과 별 간의 여행과 밀밭과 밀밭색이 나는 어린왕자의 흩날리는 머리칼을 3D로 상상해서 읽었다면 재미있을 수도 있겠구나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평범하게 순수하고 평범하게 맑은 상상력을 가진 어린이라면 <어린왕자>는 ‘뭐가 뭔지 모르겠고 재미도 없는’ 게 당연할 겁니다.

1900년 프랑스 리용에서 태어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비행사였습니다. 1921년 공군에 복무하면서 비행사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1926년에 <비행사>, 1929년에 <남방 우편 비행기>를, 1931년에 <인간의 대지>를, 1941년에 <야간 비행>을, 1942년에 <싸우는 조종사>를, 그리고 1943년에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와 <어린 왕자>를 썼습니다. 그리고 연합군 정찰비행대에 들어간 생텍쥐페리는 1944년 7월, 코르시카섬 기지에서 정찰을 떠난 후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어린왕자>는 20대의 <비행사>와 30대의 <남방 우편 비행기>와 <인간의 대지> 그리고 40대의 <야간 비행>과 <싸우는 조종사>,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 너머에 있는 소설입니다.

작품은 작가의 가치관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왕자>는 인간 생텍쥐페리의 가장 깊고 성숙한 성찰이 투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40을 넘긴 작가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가치는 ‘선택과 책임’입니다. 그가 여우와 어린왕자의 입을 통해 말하는 ‘길들임’이란 선택한 대상에 대한 '익숙함'을 뜻하고, 뱀과 어린왕자의 입을 통해 말하는 ‘돌아감’이란 선’한 대상에 대한 ‘책임’을 뜻합니다.

그 책임이란 ‘길들인 대상에 대한 예의’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길들인 사람을 대하는 데 가장 필요한 가치. 책임, 믿음, 예의.

<어린왕자>는 뻔뻔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를 길들여버린 장미를 향해 떠납니다. 그 장미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장미가 아니라 수천 수만 송이 장미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어린왕자는 자신의 장미가 있는 별을 향해 떠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 별을 향해 떠나게 도와주는 역할을 뱀이 합니다. 아담과 이브 사이에 뱀이 있듯이 어린왕자와 장미 사이에 뱀이 있습니다. 금단의 과일을 따 먹으라고 뱀이 꼬드기듯 금단의 선을 넘어서라고 뱀이 꼬드겼습니다. 뱀은 어린왕자를 어디로 보냈을까요.

열네 살에 읽었던 <어린왕자>에서 나는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보아구렁이를 보았고, 방울소리를 내는 우물과 수천의 사연 있는 별을 보았다. 그리고 길들여지길 원하는 여우를 기억했습니다.

사십여 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는 <어린왕자>에서 지나친 명령은 하지 않는 슬기로운 왕을 보았고, 교만을 가릴 만큼 아름다운 장미를 보았고, 선택에 대한 책임감으로 번뇌하는 ‘여린왕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번뇌를 끊어주는 뱀을 보았고, 지중해 바다에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작가 생텍쥐페리를 보았습니다.

---어린 왕자는 뱀을 향해 걸어갔다....

79쪽

뱀은 마치 금팔찌같이 왕자의 발목을 돌돌 감고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건드리는 사람은 제가 나왔던 땅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되는 거야. 그러나 넌 순진하고 게다가 다른 별에서 왔으니까..... .”

왕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같이 연약한 사람이 이처럼 바위투성이인 지구에 오다니, 참 가엾은 생각이 드는구나. 만일 네가 네 별이 못견디게 그리워져 돌아가고 싶다면 어떻게 하든지 도와 주겠어. 그리고...... .”

---생텍쥐페리는 전쟁의 포화 속으로 날아갔다....

---어린 왕자는 장미에 대한 책임감으로 지구를 떠나 자신의 별로 돌아갔다....

89쪽

“내가 나의 장미꽃을 소중히 여기는 건...... .”

왕자는 이것도 잊지 않도록 되풀이해서 말했습니다.

“사람이란 이런 소중한 일을 잊어버리고 있어. 그러나 너는 이걸 잊어서는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지키지 않으면 안 돼. 장미꽃과의 약속을...... .”

100쪽

왕자는 한참 동안 있다가 또 말했습니다.

“너 좋은 독 갖고 있니? 날 오래 아프게 하지 않을 자신 있니?”

나는 가슴이 뭉클해져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조금 있다가 또 말했습니다.

“이젠 저리 비켜.... . 나 내려가고 싶어.”

그 때, 나는 담 아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곳에는 30초 안으로 사람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노란 뱀 한 마리가 왕자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105쪽

“하긴 두 번째 물 때는 독이 없긴 하지만..... .”

105쪽

어린 왕자는 내 손을 잡고 몹시 걱정이 되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지 말 걸 그랬어. 걱정을 하게 될 테니까. 난 죽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야.... .”

나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아저씨, 그 곳은 너무 멀어. 이 몸뚱이를 가지고 갈 수 없단 말이야. 너무 무거워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몸뚱이는 헌 껍질 같은 거야. 헌 껍질 같은 건 버려도 슬프지 않아......”

106쪽

왕자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젠 다 왔어. 나 혼자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게 가만 내버려 둬 줘.”

그러면서 왕자는 모래 위에 앉았습니다.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어린 왕자는 이렇게 또 말했습니다.

“이거 봐 아저씨, 내 꽃 말이야..... 난 그 꽃에게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그건 정말 약한 꽃이야. 그리고 순진하고, 바깥 세력에 대항하여 자기의 몸을 지키는 거라곤 네 개의 자그마한 가시밖에 없는 꽃이야...... .”

107쪽

어린 왕자는 잠깐 망설이다가 일어서서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습니다.

그러나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왕자의 발목 근처에 노란빛이 번쩍 빛났습니다. 어린 왕자는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리도 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마침내 나무가 쓰러지듯 조용히 쓰러졌습니다. 땅이 모래이기 때문에 소리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생텍쥐페리는 무엇에 대한 책임감으로 코르시카섬을 향해 날아갔던 것일까....

20대의 <비행사>와 30대의 <남방 우편 비행기>와 <인간의 대지> 그리고 40대의 <야간 비행>과 <싸우는 조종사>,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그의 소설을 끝맺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그의 삶도 매듭지어졌습니다. 전쟁 중 정찰비행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작가는 혹시 <어린 왕자>가 아닌 ‘여린 왕자’와 같은 선택을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이기에 순수의 상징 <어린왕자>를 두고 이런 의문을 품어볼 수 있는 게 아니겠나 합니다.


2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대학교 때의 지도교수님을 뵈었습니다.

“선생님, 예전에 읽지 못했던 세계명작소설들을 요즘 읽고 있는데요,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십대에 이런 책을 읽었던들 얼마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요.”

그 때 교수님께서 딱 집어주신 한마디.

“그렇게 접근하는 게 바로 수용미학이지.”

‘이런 소설을 나이 스물에 읽은들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으랴’와 ‘이제야 이런 소설을 읽다니’ 하는 감정의 교차점에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정리해주는 단어.

수용미학! 受容美學!

리얼리즘이나 참여문학이 아니면 한쪽으로 젖혀놓고 보던 스물의 시절에 들었다면 ‘수용미학’이란 단어는 귓등으로 넘겼을 단어입니다. 그러나 ‘스물의 나이였다면 내가 뭘 알았을까?’ 하고 안타까워하는 나이에 듣는 ‘수용미학’이란 단어는 그 자체가 한편의 시처럼 감동적이었습니다.

수용미학.

스승으로부터 받은 화두를 외듯 ‘受容美學!’을 외며 어린왕자를 다시 읽었습니다. 그리곤 생각했습니다.

‘누구든 만남을 선택해야 하는 나이가 되면 어린왕자를 읽어보라 해야지. 인연을 쉽사리 만들지 않고 인연을 쉽사리 버리지 않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어린 왕자>를 읽고 마음에 내내 ‘여린 왕자’가 남아 생각함에 측은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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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솔바람 2012/06/14 1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의 스승님께서 달아주신 댓글입니다.

    ---
    옥이가 직접 체험한 대로 <어린 왕자>를 10대의 소녀 때 읽었을 때와, 이제 불혹의 나이를 넘어

    다시 읽어 볼 때의 같은 텍스트에 대한 수용 미학의 편차는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겠지요.

    어렸을 때는 텍스트의 글자를 따라 그 의미를 단순하게 조합하고 그에 따라 작품이 주는 의미나

    감동 혹은 교훈을 읽어내기에 급급하는 '단순 수용'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겠지요.

    그러나 이제 이제 원작자와는 너무나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먼 거리에 있는 한국의 한 중년의 여성독자로서

    <어린 왕자>가 주는 의미는 작자의 의도를 넘어 그 텍스트를 선택적이고 분석적으로 바라게 되고 독자 자신의

    독특한 시선과 지평으로 그 작품이 놓여 있는 지평과 새로운 융합을 얻어내어 마침내 '분석 비평적 수용'의 단계로

    진입하게 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옥이의 비평적 글이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어린왕자를 '여린왕자'로 읽어내는

    비평적 시각과 선택적 가치의 발견이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하겠지요. 특히 거기서 '인연'과 '책임감'의 가치를

    발견해낸 것은 옥이라는 탁월하고 성숙한 독자가 아니면 쉽사리 발견할 수 없는 것일테지요.

    그러면서 다른 독자라면 <어린 왕자>를 통해서 그 여린 모습의 원천이 되는 미지의 세계로의 끝없는 지향성에도 얼마간의 순수한

    가치가 숨어있을 거라는 해석을 생텍쥐페리의 코르시카 섬으로의 비행과 융합시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차제에 욕심을 부린다면 이제 옥이의 그 원숙한 '분석 비평적 수용'의 단계는 보았으니 수용미학의 마지막 단계인

    '창의적 수용'의 단계를 보여줄 것을 기대해 마지 않겠어요. <어린왕자>에 못지 않은 성인적 동화의 세계를 직접 창작해내는

    그런 단계를 기대한다는 거지요.

    그럼 이만 줄이고..

  2. 솔바람 2012/06/14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에게 어린왕자를 소개해주신 스승님의 댓글입니다.

    --
    지난 달에 싱가폴에 있는 딸한테 갔다가,

    마침 라이온 킹 뮤지컬을 하기에, 거금을 들여 갔다.

    시작부터 끝까지, 정말 감동과 환희가 가득했지.

    영어로 말하는 거 제대로 알아들으려고 대본을 대강 읽고 갔는데도,

    완전 만족스럽지가 않아서,

    집에 와서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서 옛날의 영화로 나온 라이온 킹을 다시 봤지.

    완전 다른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어.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가 무대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는데 (너무 착한 역이어서 - 인사하는데, 악당 스카에세 관중들이 큰 박수를 주더라고, 그의 연기 때문에...),

    그런데 혼자 음미하며 보는 영화 속에서 심바 아버지의 하는 말들 속에서 그 사상과 책임감 등이 마음에 들었어.

    농담 같은 티몬과 품바의 대화에서도 마음에 콕콕 와 닿는 말들이 있고...

    전에는 그렇게 못 느끼고 그냥 웃어버리고 만 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어릴 때 보던 라이온 킹과 나이 들어 보는 라이온 킹, 또 늙어서 보는 라이온 킹, 전부 다른 감동을 주겠다는 생각을 했지.

    고등학교 때 읽었던 소설도 지금 보면, 구석구석 더 많은 의미를 느낄 때가 있어.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드라마를 보면서 더 많이 우는 거 같아.

    모든 사람에게 내가 다 이입되거든. 그래서 주인공이 울 때마다 우는 거지. 내용들이 내 경험과 비슷한 것이 있을 때는 더하고.

    삶의 경험이 그 모든 이해의 폭을 넓혀 주는 것이겠지.

    그래서 정말 좋은 책은 나이들어서 다시 한 번 읽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어린 왕자도 그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어린이나 어른을 위한 것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가족이 함께 보는 책이라 하면 어떨까?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거기서 느끼는 것이 다를 것이고.

    설혹 그 깊은 내용을 다 이해 못하더라도, 그 아이가 느끼고 얻는 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