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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강설경(鶴降雪景)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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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業報)를 녹여내는 동심(童心) -제랄다와 거인

--옛날에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이 혼자 외로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 잡아 먹는 거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는 날카롭고 수염은 가시처럼 뾰죽뾰죽, 코는 큼지막했어요. 물론, 기다란 칼도 갖고 있었고요. 괴팍스런 서이에, 먹성은 엄청났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요, 아침밥으로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것이었어요. --

<제랄다와 거인>의 첫 페이지엔 이런 글이 나오며 거기에 어울리는 투박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토미 웅거러 그림의 특징인 대충 그린 듯한 테두리 안에서 거인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고, 거인의 뒷 배경은 검게 칠해져 있다.

이런 그림을 보여주며 무서운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것이었어요.’ 하는 부분을 숨죽여 읽는다. 말하자면 겁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둘러보면 표정이 각색인데, 이미 동화책은 책 속의 세상일뿐이란 걸  아는 아이들은 괜히 무서운 척 하기도 하는데, 진짜 공포는 없고 장난기 넘치는 눈빛이다. 우리 딸은 이 부류에 속한다.

만약 우리 아들에게 이런 거인을 만나면 어쩌냐고 묻는다면 뭐라 할지 답이 보인다. 정의에 불타는 훈이 표정을 하고서  ‘내가 로봇으로 변신해서 얍!’ 하고 책 속의 거인에게로 주먹을 날릴 것이다. - 성북 정보도서관에서 상영한 로봇 태권브이를 본 이후로  우리 아이들의 화두는 로봇 태권브이다.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내가 초등학교 때 보았던 로봇 태권브이에 내 아이들이 푹 빠졌다. 왠지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

내가 처음 <제랄다와 거인>을 보고는 좀 당황했었다. 식인 거인이 주인공 이라니, 그것도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식인 거인이라면 아이를 잃은 부모 가슴에 남은 증오와 한은 어쩌라고 하는 생각에서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말하자면 과오가 용서 안 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사람 잡아먹는 거인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인다. 악어 아리게 - < 산을 넘은 아리게> 교원 출판사 - 가 유치원 가방을 메고 악어 유치원에 가는 이야기가 너무 당연하고 거슬리는 것 없듯이 거인이 사람을 잡아먹는 이야기도 단순한 무서움이지 혐오감이 아닌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더니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이해방법의 차이였다. 거인이 아이를 잡아먹는 것은 늑대가 아기 염소를 잡아먹는 것과 같이 그저 잡아먹는  낱말 뜻 그대로 받아들여 이해하는 방법이다. 반면 어른들은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낱말 안에 00살인이니 00살인범이니 하는 경험치가 부가되기 때문에 역겨움과 끔찍함, 잔인함 등의 감정이 압도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지난날에 대한 잊음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원수진 일을 잊지 않고는 결코 거인을 받아들여 줄 수 없음을 어른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제랄다가 만들어 내는 멋진 요리에 있다. 빨주노초파남보 총 천연색으로 치장한 음식들, 다리를 들고 있는 신데렐라 식 칠면조 구이의 발목에 신겨져 있는 빨간 구두를 보는 재미, ‘거인의 기쁨’이라 불리는 과일과 쿠키로 치장한 아이스크림 케이크! 와, 이런 것들을 먹는 거인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작은 여자아이인 제랄다가 저런 요리들을 다 해낼 수 있다니 하는 놀라움과 부러움. 이런 다양한 감정들이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이다. 더구나 해학과 암시가 어우러진 맨 마지막장의 그림 -수염 깎은 거인이 어설프게 웃고 있는 표정에서 아이들은 더 이상 괴물 거인이 아닌 사람 거인을 본다. 그 못생긴 거인의 웃음에서 아이들은 거인에 대한 두려움이나 편견 따위를 아예 잊고 만다.

비록 사람을 잡아먹는 업보(業報)를 운명으로 타고 났을지라도 그래서 그간은 아이들을 여럿 잡아먹었더라도 음식을 잘 하는 어린 여자아이 제랄다를 만나 음식에 대한 새로운 경지를 접하고 더 이상 사람을 잡아먹고 싶은 생각이 싹 없어진 거인을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의 힘이다. 동심(童心)의 용해력(溶解力).

우리 사회가 아니 우리 어른들이 아니 내가 아이들의 이런 용해력을 갖고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 간의 오랜 다툼이나 나라들 사이의 전쟁은 지나간 것들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혀 발생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제랄다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쓰러진 거인에게 음식을 대접 했듯이, 아이들이 거인을 용서 했듯이, 서로 위해주고 용서하고  지난 일을 잊어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물론 거인은 자신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 마을의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용서를 구한다. 동그랗고 빨간 막대사탕은 진실하고 뜨거운 반성과 사죄의 상징이다. 그 사탕을 받아든 아이들은 사람 잡아 먹는 거인을 그냥 큰 사람 , 거인으로 받아들여준다.

누구나 살면서 마음에 쌓이는 잊을 수 없는 아픔이 있고 원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것으로도 녹여지지 않고 한(恨)이 되어 쌓인다. 그런 한(恨)의 되풀이가 불교 용어로 업보(業報)가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사람을 잡아먹어야만 하는 업보(業報)를 타고난 거인.

그 거인의 업보를 벗겨준 것은 다름 아닌 음식보시(飮食布施)였다. 먹을 것을 베푸는 것. 제랄다의 정성어린 음식 맛은 너무도 기가 막혀 사람 잡아먹는 업보를 녹여주었다. 내가 누군가의 음식을 준비할 때 나의 요리가 먹는 사람의 업(嶪)을 소멸시킬 수 있다면 어라나 큰 기쁨일까, 행복일까!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후엔 아이들과 요리를 해야 한다. 제랄다처럼. 아주 간단한 요리도 아이들은 즐거워한다. ‘너희가 제랄다라고 생각해봐.’라고 말해주면 더 좋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요리 중 감자 삶기가 간단하고도 좋다. 거인이 식은 감자를 먹으며 투덜거리는 장면이 나오는 데 따뜻한 감자요리를 만들어 주자고 연결시켜 말해주면 더 진지해 진다.

칼은 위험하니 피하고 가정용 필러기로 감자를 깎으라고 한다. 너무 큰 감자는 반 썰어서 삶는데 이때 케이크에 따라오는 플라스틱 빵칼을 주고 톱질하듯이 썰어보게 하는 것도 좋다. 물론 박을 타는 흥부처럼 슬근슬근 썰어보자는 말도 잊지 말고.

감자가 잠길 정도의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삶으면 더 맛있다. 감자의 칼륨 성분이 소금의 배설을 돕기 때문에 감자와 소금은 원래 궁합이 잘 맞는다.

젓가락으로 찔러보아 막힘 없이 쑥 들어가면 익은 것인데, 아이들 스스로 찔러보아 익지 않았을 때와 익었을 때의 느낌을 손으로 느끼게 해준다.

잘 익었으면 꺼내서 예쁜 접시에 담아 먹는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요리이므로 접시가 화려하고 예쁠수록 좋다. 보기 좋은 떡을 만드는 것이다.

먹으면서 ‘이렇게 맛있는 감자를 거인이 먹으면 사람 잡아 먹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시겠네.’라고 칭찬해주면 기분 짱!

내가 직접 만든 감자 요리와 패스트푸드의 감자 튀김의 차이점과 공통점 찾기 놀이를 하는 것도 재미있다. 논술은 멀리 있지 않다. 이렇게 놀며 먹으며 차이점과 공통점을 찾고 얘기하다 보면 논리력도 저절로 키워지고 발표의 기쁨도 저절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 그림동화는 종합예술이다. 그림이면 그림, 내용이면 내용. 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더구나 그림과 내용이 상호상승작용을 하여 서로를 더 빛나게 한다.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섭렵하게 된 그림동화를 통해서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워졌다. ‘그림동화를 읽는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진정 어른들 자신을 위해 읽는 것이다.

그림동화.  그 보고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앞으로 그림동화와 연계되는 체험학습 ( 유아 - 초등학생과 동참을 원하는 그의 부모님) 을 하리 하우스의 체험마당에서 열 계획입니다. 하리 하우스가 가능한 공간이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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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랑가방과 마틸다

틈틈이 초등학생용 권장도서 중 호기심 가는 책을 골라 읽고 있다. 대부분 외국 창작동화인데, 내가 초등학생 시절엔 접할 수 없던 책들이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읽으면서 이 책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늘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나만의 방법으로 별표를 하고 있는데, 별표를 많이 주는 첫 번째 기준은 얼마나 감동적이냐이다. 감동 전에 교훈을 주려는 책들이 가끔 있는데, 그런 책은 내 기준으로는 낙제점이다. 어쩌면 나의 기준이 편협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도 감동적인 동화를 읽을 때 책읽기의 재미를 흠뻑 느끼고 그래야 다른 책도 읽어 볼까하는 마음이 동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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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은 것 중 <노랑 가방> -비룡소 출판사 - 과 <마틸다> -시공 주니어-가 좋았다. 특히 <노랑가방>은 주체성과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해 볼 수 있는 책으로 저학년보단 고학년이 읽기를 권한다. <마틸다>는  옳지 못한 권위에 대한 도전적인 내용이고 결국 세상이 밝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통쾌하게 그리고 있다. <지각대장 존> -비룡소 출판사 - 과 함께 비교해 보아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샬롯의 거미줄>- 시공 주니어-이 영화화 되어 국내에서 화재가 되고 있다. 샬롯이 열심히 거미줄 짜는 얘기를 책으로 읽었을 때는 특별한 감동이 없었는데 영화로는 어떤지 궁금하다. 그러나 내가 책으로 읽고 영화로 보고 한 것들의 대부분은 영화가 책이 주는 감동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는데, 아마도 영화는 피동적 행위이고 책읽기는 능동적 행위인데서 오는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간혹 권장도서목록을 믿었다가 실패하는 경우도 있는데, 좋은 책에 대한 기준이 다른 데서 오는 차이일 수도 있다. 평가 기준의 차이에 의한 것 말고 간혹 실수로 책을 잘못 선택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000옮김을 사야 하는데 실수로 000엮음으로 된 책을 사는 경우가 그러하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일본 작가의 <도련님> 이란 책을 읽었는데 읽다가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이 정도 수준의 책을 그렇게 대단한 것으로 광고를 하다니 하며 실망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겉표지를 찬찬히 보는 순간 알았다. 000번역 또는 000옮김이 아니라 000엮음이었던 것이다.

실은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거의 금서 취급을 하는 책 중 하나가 000엮음 또는 편집부 엮음 이라고 돼 있는 책들이다. 다시 말하면 줄거리 중심으로 엮은 글로서 그런 글들은 원작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대부분 원작이 갖고 있는 웅장한 서사나 혼이 깃들어 있는 묘사는 가지치기 당하고 줄거리를 짜는 데 필요한 껍질만 남은 글들이 십중팔구다. 이렇게 껍질만 있는 책을 읽게 되면 동화나 소설을 감동적으로 읽을 수 없다. 감동을 느끼지 못하면 책에 대한 욕구가 주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서사나 묘사가 뛰어난 문학작품을 오히려 지겹게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완역된 책 고르기를 강조한다. 빨간 머리 앤도 폭풍의 언덕도 ‘논술대비 초등 세계 명작’ 운운하며 엮음으로 나온 책 말고 토씨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 우리말로 옮긴 책을 읽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긴 글을 읽기 어린 나이라면 20 페이지짜리 외국동화를 20페이지짜리 우리말로 옮긴 그림책을 보는 편이 훨씬 낫다고 본다.  

좋은 책을 읽는 목적은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논술 대비가 목적이 아니다. 주객이 전도돼서 결과가 좋을 리 있겠는가?

지난 여름 휴가 길에 휴게소에서 <청소년을 위한 장길산>을 싸게 팔기에 옳거니 하고 사서 읽었는데 재미있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났는데 ‘원작으로 읽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자꾸 들었다. 같이 읽은 남편도 그 점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하나 하게 된 생각.
’내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어도 청소년을 위한 장길산이나 청소년을 위한 토지는 권하지 말아야지. 차라리 조금 어 커서 성인이 된 후에 그냥 <토지>와 그냥 <장길산>을 읽으라고 해야지.

우리집 아이들 책을 여기저기서 물려 받다보니 때론 내 관점에서 보아 부적합한 내용을 담은 책들이 있다. 아이들이 조금 더 커서 읽었으면 하는 생각에 얻어 갖고 온 상자에서 꺼내지 않고 쌓아두었는데, 용케도 이책 저책 꺼내서 읽어 달란다. 할 수 없이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을 읽는데, 알리바바의 욕심쟁이 형을 도둑들이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는 표현이 나와서 순간적으로 ‘칼로 찔렀다.’로 얼버무려 읽었다. -칼로 찔려서 어떻게 됐는데? 라고 딸이 물으면 아마 의사선생님이 고쳐 주셨겠지 뭐! 라고 대답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안 물어 보더라 - 다음 장면에 토막 난 시체를 구둣방 할아버지가 꿰맸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또 어쩔 수 없이 대충 넘어가서 읽어 주는 수밖에.  아무리 동화라지만, 자기네 것을 훔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도적들 얘기는 우리 아이들의 정서에 조금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차라리 아니 읽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글쎄 ......

얼른 하리하우스를 손봐서 책들을 정리했으면 좋겠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좋은 책을 딱 꽂아놓고 이렇게 끔찍한 내용이 있는 책은 까치발을 하고도 뽑을 수 없는 곳에 꽂아두고 싶다.

세상에 좋은 책은 끝없이 많은데 책값은 비싸고 어쩌나. 벌써 여기저기 흩어져버린 아이들 세뱃돈을 다시 그러모아 새로 나온 그림책이나 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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