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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이야기  - 아름다운 학교- 하리 하우스

 하리 하우스는 결혼 생활 17년 만에 일궈낸 남편과  나의 첫 번째 집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하리하우스가 고향이고, 귀소의 바탕이며, 아름다운 감성의 원천이 되길 바라는 꿈으로 일궈낸 집입니다.

 더불어 무엇이든 가르치는 것이 천성인 나의 소망이 깃든 학교이기도 합니다. 자연을 만끽하고, 존중하며,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배우고 가르치고 싶은 소망을 이룰 꿈의 학교입니다. 학교는 여유롭고 자유롭게 놀며 읽으며 체험하며 함께 먹고 함께 잠들 수 있는 터전입니다.  그 터전을 일구려고 열심히 하리하우스를 가꿨습니다.

 지난 4월 방수공사를 시작으로 데크와 난간, 외벽 사이딩과 난방, 창호, 가구에 이르기까지 정성스럽게 일을 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동생 내외에 대한 보살핌의 마음으로 하리하우스 리모델링을 기획, 감리 해 주신 막내 오라버니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목수’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신목수님들 덕분에 더 아름다운 하리하우스가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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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 - 가정
  
 마침 아이들 유치원 방학에 맞추어 하리 하우스가 기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리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하리의 15박 16일이 아이들에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쁨과 서로의 갈 길로 헤어질 때의 섭섭함을 알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손님이 올 시간을 헤아리며 들떠있던 모습. 서먹함을 금방 잊고 어울리던 모습. 차를 떠나보내고 돌아서오며 눈물짓던 모습. 그 서운함을 또 다른 손님을 기다리는 것으로 잊어가던 모습. 그런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아이들 감성은 더 아름다워지고 더 깊어지고 풍부해졌을 겁니다.  나 또한 아이들과 아빠가 아쉽게 헤어지고 손꼽아 기다리고 주말이 되어 팔짝팔짝 뛰며 만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상실감이 어떤 것일지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비 없이 크는 불쌍한 것.’ 이나 ‘어미  없이 크느라고 오죽 하겠냐.’ 란 말 속에 들어있는 ‘연민’의 감정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몇 밤만 자고나면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간이 정해진 기다림이지만 아이들은 아빠를 보고 싶어 하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습니다. 영영 떠난다는 낱말의 개념을 알 수 없는 나이의 아이들이 한 부모가 하늘나라에 가서 다시 오시지 못한다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기까지 겪어야 할 아픔은 신데렐라나 콩쥐가 겪어야 했던 시련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일겁니다. 그 아픔은 남은 한 부모와의 극진한 쓰다듬음으로 치유 될 수 있는 상처일 수 있습니다.  어린이 동화 <아빠 보내기> -시공 주니어 . 박미라 지음 -는 아빠와의 영원한 이별을 겪는 엄마와 딸이 흙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찾고 상실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혼과 같은 문제로 엄마 아빠를 가까이서 느끼지 못하고 헤어져 살아야 하는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은 더 큰 상실감이나 외로움과 같은 정신적 고통을 느낄 겁니다. 부모의 이혼이라는 쉽게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크는 아이들이 느낄 단절감이나 위축감은 곁에 남은 한 부모나 조부모에 의해 치유될 수 없는 상처겠구나 하니 가슴이 아렸습니다. 그 상처엔 부모에 대한 원망과 자신들의 존재가 소홀히 대접받는 다는 자괴감이 자꾸 부스럼을 만들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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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이들과 같이 읽은 동화책 <따로 따로 행복하게> - 보림. 베벳 콜 지음 -라는 책과 <코코,네 잘못이 아니야> - 치구 미디어, 비키랜스키 지음- 라는 책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른들 세계에서 이혼이란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피할 수 없이 아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측면에서 한 번 쯤 다루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 따로 따로 행복하게> 의 경우 베벳 콜 특유의 유머와 만화풍의 자연스럽고 솔직한 그림이 아이들에게 이혼의 사유와 과정과 결과를 명쾌하게 이야기 해 주어서 재미도 있었습니다. <코코,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책이 이혼 당사자인 부모와 아이의 심리를 차분히  묘사했다면, 그럼으로써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느낌을 준 반면, <따로 따로 행복하게>의 경우는 결혼식의 반대인 끝혼식이라는 상황과 엄마 집과 아빠 집 사이에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굴을 파서 연결한다는 아이들다운 발상으로 이혼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두 책 모두 어른들의 자기 변명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이혼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이혼이 어른들에게는 ‘있을 수도 있는 정당한 선택’이라는 주장을 펴고, 그래서 아이를 두고 이혼하는 부모들에 대한 면죄부 역할을 해 주는 책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 시대에 어른들 세계에선 이혼이 당사자의 인격적 장애나 사회적 걸림돌이 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부모를 한 가정에서 보고 자라지 못하는 아이들에겐 우물같이 샘솟는 마르지 않는 아픔이 될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학교 이야기에서 생각해 보지 못했던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으니, 아이들과 아빠와 떨어져 있은 기간이 내게도 좋은 거름이 된 기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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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이야기 - 손님

 무엇보다 하리에서의 15박 16일 동안의 첫째가는 기쁨은 사람을 만나는 기쁨이었습니다.

 25년이 한결같은 친구들과의 하룻밤은 새벽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도 아쉬움을 남겼숩니다.

 이집 저집 숟가락 개수도 아는 처지인 남편 직장 동료가족들과의 모임은 오핸만에 불러보는 ‘섬마을 선생님’으로 인해 더 흥겨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니 무슨 말을 해도 다 내맘처럼 받아주는 친구는 트렁크 하나 가득 살림살이를 싣고 와서 부엌 수납장을 채워주었습니다. 아직 비어있는 다용도실에 세탁기도 하나 넣어준다고 하고 갔는데, 내가 친구에게서 받는 것은 10킬로그램 세탁기보다 더 큰 우정입니다.

 솔농원으로 휴가 왔던 셋째 오라버니 가족도 하리하우스에서 차한잔을 나누었습니다. 머지 안아 완성될 학운산방에서도 두런두런 차를 마실 얘기를 하였습니다.

 시부모님과 형님 내외가 함께 방문하셔서 텐트에서 삼겹살 돌구이를 즐겼습니다. 시매부께선 우리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좋은 공간이 마련되었음을 많이 축하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꼬마 손님도 맞았는데, 바로 지윤이와 지승이가 하리에서 사귄 친구 ‘성희’입니다. 자고 일어나자마자 친구 타령을 하더니, 아침 밥숟가락 놓기가 무섭게 친구를 부르러 갔습니다. 친구의 집 앞에서 ‘성희야, 놀자!’를 외쳤을 아이들 모습은 참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보고픔과 그리움에 잠겨 먼 옛날 내가 불렀던 소꿉친구들의 이름을 떠올려 봅니다.

 ‘금옥아, 경순아, 옥분아, 순희야.  우리집에 놀러와, 같이 놀자!’

 언제나 그 친구들을 맞아 차 한잔을 나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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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이야기 - 산책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또 공사 마무리 손질을 해주러 막내 외삼촌이 들르곤 했지만 우리 아이들이 짬짬이 심심하다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저희들끼리 흙 파고 풀잎 따며 노는 것에 익숙치 않으니 둘 만 있을 땐 엄마 같이 놀자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옥수수 밭도 매고 콩밭도 매고 깨도 속아야 하지만 텃밭을 향해 난 창을 열고 ‘엄마, 엄마.’를 외치는 아이들을 계속 윽박질러 보낼 수 없어서 풀이 무성한 깨밭을 두고 호미를 놓아야 했습니다. 그런 순간에 문득문득 아주 선명한 추억하나 떠오르곤 합니다.

 마루 끝에서 자다 굴러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봉당에서 잠든 걸 그냥 놓고 살며시 가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깨어보니 나는 봉당에서 자고 있었고 집안엔 아무도 없었으며 너무 따갑지 않은 햇살만 나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고요가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나는 울며 불며 엄마를 부르며 아랫말을 지나고 연못가를 지나 무수막골 다랑이 논두렁을 몇 지나 엄마에게 달려갔습니다. 그 때 엄마의 표정이 어땠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에 없습니다. 다만 엄마가 칡 잎에 싸 놓았다 주신 새까만 오디를 한 입 물고 꿀떡꿀떡 울음을 그치던 일이 햇살만큼 노란 영상이 됩니다.

 그런 아름다운 추억하나 남겨주고자 아이들 손을 잡고 동에 산책을 나섰습니다.
 햇살은 따가왔고 한낮의 거리엔 다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뭐 살게 없나 하는 맘으로 하나로 마트에 들러 딸이 좋아하는 색으로 파리채를 하나 샀습니다. 분홍색 파리채가 파리를 잡기엔 너무 예뻤습니다.
 
 그리고 스티로폼 주워담을 봉지를 사기 위해 새로 생긴 철물점엘 들렀습니다. 마대자루를 사는 대신 헌 마대자루 하나를 얻고 대형 비닐 봉지를 두장 샀습니다.

 상수도 요금 자동이체 관계로 면사무소에 들렀다가 시원한 수박을 대접받았습니다. 소방서를 지나는 길에 아들이 좋아하는 119차을 가가이서 보았습니다. 소방서 옆엔 파출소가 있었는데 서울의 관공서와는 다르게 친근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리의 또 다른 자랑거리이기도 한 새한서점에 가서 책도 보았습니다. 아이들 성화에 못이여 곰들이 푸 영문판을 한 권 샀습니다. 그림만 보아도 밝은 동물들의 세상이 느껴질 것 같았는데, 기대만큼 잘 보지는 않았습니다. 다음에 갈 때 기름종이나 가져가서 따라그리기를 해야겠습니다.

 이왕 산책을 나선 김에 아이들과 함께 데크에서 보아온 소나무언덕을 넘어 보는 건데, 그땐 새로 생긴 마대자루에 스티로폼 채울 생각에 집으로 서둘러 갔었습니다. 지난 일은 늘 아쉬움이 남는 것. 다음에 아이들과 하리 산책을 할 땐 더 멀리까지 가 봐야 겠습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 - 개미

 하리하우스에 기거하며 두 아이와 나 모두 대장이 되었습니다. 다름 아닌 개미잡기 대장.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 집에 온 손님 모두가 개미잡기 대장이 되었던 것도 같습니다. 여리디 여리고 아직도 소녀 같은 내 친구 원희가 가차 없이 개미를 박멸시키던 모습이 떠올라 지금 키득키득 웃음이 나옵니다.

 나무로 리모델링을 한 자연친화적인 집이라 그런지 유난히 개미가 많습니다. 먹이를 구하러 잠시 드나드는 곳이 아니라 아예 우리와 같이 살자고 여왕개미까지 모신 집을 지어놓은 것 같습니다. 내가 아무리 자연을 좋아하고 보호하고자 한다고 하여도 정성들여 가꾼 하리하우스 안방까지 개미들에게 내어주며 공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개미가 눈에 뜨이면 가차 없이 잡아버립니다. 아니, 붙여버린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습니다. 넓은 상자 포장용 테이프를 끈적거리는 면이 겉으로 오게 말아서 개미를 붙여버립니다. 평소 바닥에 있는 머리카락 제거용으로 쓰던 방법인데, 눈곱 부스러기만한 불개미를 잡는 데는 안성맞춤입니다. 휴지로 눌러 잡아도 관절이 워낙 유연한 개미들인지라 누르는 압력을 기기고 꼼지락꼼지락 살아나기도 합니다. 걸레로 잡으니 걸레의 올 틈새에 끼여서 물에 헹궈도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테이프의 끈적임에는 저들의 유연한 관절도 기를 펴지 못합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작은 음식물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부스러기 하나를 보고 어떨 때는 수백은 됨직한 개미떼가 나와 있습니다. 이젠 우리 아이들도 익숙해져서 ‘엄마, 개미! 테이프, 테이프!’를 외치며 달려가서 테이프로 개미를 박멸시키기도 합니다. 어쩌다 풀밭에서 개미를 잡아 갖고 놀다 재미로 밟아 죽이는 것을 보면, ‘지승아, 지윤아, 그 개미도 자기 집에 가야 하잖아.’ 하고 말립니다. 그러나 지구 전체가 내 소유는 아니지만, 적어도 하리하우스 집안만큼은 온전히 내 것으로 쓰고 싶습니다. 개미와 나눠 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음을 개미들이 알고 내 집에서 밖으로 -되도록이면 마당 보다는 뒷밭으로 - 이사를 가 주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램입니다.

 그런데 소설 <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읽고 난 후부터 좀 특별한 개미를 보면 ‘이 개미가 혹시 103호 개미 아니야!’ 하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책 속의 용감무쌍한 103호 개미가 개미세계 어딘가에 존재하며 우리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을 수도 있단 상상이 늘 따라다닙니다. 소설 <개미>의 마력이 개미세계에 대한 확고하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밭에서 풀을 뽑다가 혹 개미집을 건드려, 하얀 밥풀 같은 개미알을 보게 되면 잠시 고민합니다. 호미로 파서 싹 뭉개버릴까. 그냥 놔둘까. 그러나 그런 고민을 오래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개미알이 보일 정도로 집을 건드린 후엔 어느새 103호인 듯한 개미가 손목까지 타고 올라와 따끔하게 깨물기 때문입니다. 마구 기어오르는 개미도 털어야 하고 또 텃밭이 서류상 하리하우스 것으로 되어 있지만 개미들에게서까지 그 땅의 권리를 넘겨받은 것이 아니므로 개미들과 그 땅을 공유해야 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개미집을 초토화시티는 일을 그만두곤 합니다. 베르나르가 개미를 관찰하던 시대에 냄새를 이용해 개미와 사람의 대화가 가능했을 수 있다면, 아마도 지금은 인터넷의 세상에 개미가 들어와 촉수를 세우고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듭니다. 컴퓨터의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 순간 내 어깨위에 작은 개미 한 마리 살짝 동행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밝혀두어야 겠습니다. ‘ 우리 집 안으로는 들어로지 말아라. 너흴 살려 둘 수 없으니...’

 지난 주에 개미와 바퀴를 한꺼번에 어떤 약을 붙어놓고 왔는데 결과가 궁금해 집니다. 개미가 박하풀을 싫어한다는 정보와 둘째 솔고개 솔하우스  뒤뜰에 박하풀이 있다는 정보가 동시에 떠올랐습니다. 다음엔 박하를 옮겨 심는 일을 해야겠습니다.  아무리 내 집에 든 불청객을 죽여 없앨 수 있는 권리가 나에게 있다 하더라도 테이프에 눌려 붙어 죽어 있는 개미들을 보는 것은 아니 보느니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 이야기 - 분리수거

 하리하우스의 15박 16일 동안 내가 제일 열심히 한 일은 폐건축자재  분리수거였습니다. 애써 분류한 쓰레기들이 제대로 잘 처리되어 모두 제 쓰일 곳에 쓰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은 못 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쇠는 쇠대로 녹아 새로 태어나길 바랍니다. 그래서 어느 집 안방에 가족사진을 거는 손길 안에 쓰이는 튼튼한 못이 되면 좋겠습니다. PET병은 PET병 대로 녹아 고추밭에 씌우는 농사용 비닐로 태어나면 좋겠습니다.  스티로폼은 어떻게 쓰일지 궁금합니다. 그저 불길 속에 던져져 소각되고 만다면 몇 날을 주워모은 공이 억울학 것 같습니다. 혹시 세척 분쇄 후 압축하여 다시 쓰이려나 하고 추측해 봅니다. 빈 병류, -대부분 주거니 받거니 하던 소주병인데, 또 누군가의 손에서 손으로 건너가 주거니 받거니 하게 될까 생각하니 여러 사람 얼굴이 생각나 또 한번 미소 짓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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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이야기 - 풀

 하리에서의 일 중 가장 아쉬운 것은 아이들과 하루 종일 함께 있었지만, 많이 놀아주진 못 한 일입니다. 내가 텃밭에 있는 동안 아이들이 지루해 하면 이런 생각으로 미안함을 달랬습니다.

 ‘너희들이 크면 지겹도록 낙나악~했던 이 시간이 그리워질 때가 있을 게다. 그 그리움이 너희의 재산이 될 때가 있을 게다.’

 나의 마르지 않는 그리움의 원천이 솔고개듯  우리 아이들의 맑은 정서의 원천이 하리하우스가 될 것이란 믿음으로 미안함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나를 텃밭으로 이끌었던 가장 큰 힘은 풀들의 부름이었습니다.

 풀

풀이 나를 불렀습니다.
와서 내 뿌리를 붙들고 씨름하며 베적삼을 흠뻑 적셔 보라고
흥얼흥얼 영혼을 가진 유행가로
콩밭의 풀들이 나를 불렀습니다.
풀들이 나를 불러
온 몸을 땀으로 씻겨 주었습니다.

풀들이 나를 불렀습니다.
물들이 나를 불러 가르쳤습니다.
위가 성한 풀은 뿌리가 약하고,
줄기가 가는 풀은 뿌리가 질기고.
꽃방석처럼 한아름 퍼진 쇠비름은
한손에 뽑히고,
마디마디 뿌리 맺는 멍석 바랭이는
뽑다가 지친 나를 호미 째 주저앉히려 들고.
한 해 살이 풀이 지팡이가 된다는,
아름드리 능쟁이는 꼼짝달싹 안 하고 ...... 
풀도 저마다 이름이 있고
풀도 저마다 곤조가 있고
풀도 저마다 사는 법이 있다고
풀이 나를 가르쳤습니다.
너도 너대로 살아 보라고.
네가 사는 법대로 살아 보라고
풀빛 같은 눈망울로 가르쳤습니다.

풀들이 나를 불러
연애질하듯 속삭였습니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살아나는
民草란 이런 거라고.
짓밟아도 짓밟아도 다시 일어나는
民衆이란 이런 거라고.
풀들이 내 가슴에 뿌리 내리며
풀무질하듯 부추깁니다.
이름 모르는 태풍에 누웠던 옥수수도
저들끼리 수런수런 속삭이더니
반듯하게 허리 세우고 나를 봅니다.
저도 섰으니 너도 서라고.
그 참에 시나브로 풀도 새로 섰고.
모두 새로 서서 시작하자고
풀들이 죽자고 일어서며
나를 부릅니다.

 풀을 뽑으며 대하소설의 작가들이 생각났습니다. 토지며 태백산맥이며, 장길산이며 임꺽이며, 고요한 돈 강이며 개척되는 처녀지며...  그들은 풀을 아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숨막히는 태양 아래서 풀과 싸워 보았거나 하다못해 마당 잔디밭의 풀이라도 뽑아 본 사람들일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의 작품에서 풀의 초상화 같은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풀을 뽑아 한 군데 쌓아 풀더미를 만드는 일은 제법 신명나는 일이었습니다. 풀더미가 높이 쌓이는 만큼 거름이 쌓여 밭을 기름지게 해 주리란 생각을 하니 무럭무럭 자라 준 풀이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농사 초보가 감히 풀과의 공생을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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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이야기 - 먹거리

 하리에서의 15박 16일 동안 손님을 맞고 대접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바로 먹거리였습니다. 최대한 검소하게 먹으면서 최대한 행복을 누리게 한다는 목표로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특별메뉴는 삼겹살이었습니다. 잠자리는 준비되었으니 드실 것만 싸 오세요 했더니 손님들이 주로 삼겹살을 사 들고 왔습니다. 소불고기 숯불구이라는 특별 메뉴를 준비해 온 친구도 있었습니다. 신선한 재료를 들고 와 즉석 수제 피자를 만들어 준 손님도 있었습니다. 그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원래 현관 밖에만 나가 먹어도 괜히 더 맛있어 지는 게 삽겹살인데, 은행나무 아래서 먹고 두악산과 말목산과 금수산의 녹음을 바라보며 데크에서 먹고 했으니 그 맛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 외엔 이런 이름의 먹거리가 있었습니다.

 돼지고기 김치찌개, 부대찌개, 오징어 덮밥, 닭찜, 치킨커틀릿, 깡통고등어 무조림, 참치 김치찌개, 팽이버섯 된장찌개, 칼국수, 잔치국수, 비빔국수, 김치전, 시래기 된장국, 고추장떡, 어묵꼬치, 야채스프.

 간식으로 송편과 야채토스트, 팥 잼과 사과잼을 넣은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음료는 식혜와 오미자 차 그리고 냉커피를 준비햇습니다. 오미자차엔 꿀 대신 설탕시럽을 넣어 만들었지만, 인공 향료와 인공 색소를 넣지 않은 것만으로도 차를 따르는 손길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음식을 더 잘 해야지 하는 마음을 갖고 하면 더 잘 안돼는 겁니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해야 제 맛이 납니다. 그러니 앞으로 하리 하우스에서 음식을 드실 때 반찬이 모두 맛있으면 ‘나를 진정으로 편안한 손님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편안하게 드시면 됩니다. 혹 반찬이 간이 맞지 않고 뭔가 어색할 땐 ‘내게 너무 잘 해주고 싶어서 긴장을 했구나.’ 하고 그 특별한 대접에 행복해 하면서  드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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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이야기 -마무리

하리에서 지낸 시간은 참 행복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일궈낸 작품이기에 하리하우스에서 누리는 모든 것이  더욱 뿌듯했습니다. 15박 16일의 경험을 시금석으로 삼아 앞으로 하리하우스에서 꾸려갈 작은 학교 이야기가 좋은 학교 이야기로 별칭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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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은학교 선생님 2010/03/05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리하우스가 꿈꾸는 이야기

    하리하우스에서 먹고 자는 것이 가능해진 후로 주말이나 방학이면 힘닿는 한 아이들을 하리하우스에서 지내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 닿는 한 사람들을 불러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리하우스가 지윤 지승에게 스며들기를 바라면서 마냥 놀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한 2년 되어갑니다.
    지윤 지승을 데리고 작년 이맘때쯤 서울 롯데월드를 갔습니다. 무료입장 가능했던 나이에 가 보고 뭘 좀 탈 줄 아는 나이 되어서는 처음이었습니다. 어찌나 잘 놀던지 10시 조금 넘어 입장했는데 9시가 다 되어서야 꾀어서 겨우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활동적인 지윤이는 롯데월드가 너무 좋았나 봅니다. 또 가자고 하기에 입장료가 너무 비싸고 또 그런 실내공간보단 동네 놀이터가 더 좋다고 하며 한 5년 쯤 후에나 한 번 더 데리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리하우스하고 롯데월드하고 바꾸자고 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 겁니다. 세상에나! 한편으론 지윤이가 하리하우스를 한낱 놀이공원과 바꾸자고 하는 것에 좀 실망스러웠고 한편으론 하리하우스가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롯데월드와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공간으로 인식되어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습니다. 하리하우스는 지윤 지승을 위해 더 의미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롯데월드하고 바꾸자고 해도 안 바꿀 거라고 설명했습니다.(이런 걸 호언장담이라 하죠?)
    그리고 한 일 년이 흘렀습니다. 아이들은 하리하우스 1층에 도서관도 꾸미고 실험실도 꾸미고 화실도 꾸미고 놀이방도 꾸미고 거기에 텐트도 쳐 줄 거란 엄마의 약속을 믿고 좋아합니다. 과학을 좋아하는 지승을 위해 실험실을 만들고 (그간 갖고 싶어 했던 현미경을 고운 청운 오빠에게서 물려받았습니다. 실험실엔 일단 현미경 있으면 반은 채운 거죠) 그림을 좋아하는 지윤을 위해 화실을 꾸미고 (조만간 이젤을 장만할 거예요. 만들든 중고를 사든 물려달라고 떼를 쓰든) 둘째 외삼촌이 남긴 책도 가져오고 물려받은 책도 정리하고 우리 책도 정리하면 제법 그럴듯한 도서관이 꾸며질 것 같습니다. 다섯 수레의 책을 모아 주는 것을 당대의 목표로 삼고 있으니 한 3대 째에는 진정한 독서가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 도서관은 하리마을 이웃에게 개방할 계획입니다. 하리엔 아이들이 거의 없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댁을 방문했다가 심심할 때 들러 책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쓸 계획입니다.
    지윤이 지승이 마음에 하리하우스는 고향입니다. 편안하고 언제든 가도 되고 부모와 동격이 될 고향. 그리고 지윤 지승 둘만으로 외로울 만큼 하리하우스는 넓습니다. 그래서 혼자 자라는 소영이도 소정이도 한이도 종현이도 인경이도 유경이도 언니고 누나고 형이고 오빠로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선화언니네, 동용이 오빠네 이모, 나은이 언니네 이모, 원섭 형아네 이모, 광용이 오빠네 이모, 그림 쓱쓱 잘 그리는 이모, 그림 보고 잘 그리는 이모, 현진이 누나네 이모, 태형이 오빠네 이모, 진짜 이모, 수많은 이모들이 드나들며 수다를 떠는 시끌벅적함 속에서 하리하우스가 여럿의 고향으로 자라길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도 더 폭넓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위해 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빠 보내기>와 <똥 싼 할머니>

 아이들에게 ‘죽음’이란 문제는 난해하고도 반면 가벼운 주제다. 죽음은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엄마가 동화책을 읽어 주던 시절부터 익숙하게 들어 본 이야기기도 하다.  그러나 책을 통해 겪어본 죽음은 실제의 상황과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아이들은 조부모나 부모의 죽음처럼 현실로 닥친 죽음의 상황에서 담담하게 아니 냉담하게까지 보이는 행동을 한다.

 죽음에 관한 인식이 그 정도인 아이들이 아빠를 떠나보내는 이야기가 박미라의 <아빠 보내기>다. 더 정확히는 아빠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엄마를 도와주는 과정을 통해 슬픔을 이겨내고 현실 생활로 복귀하는 방법을 익히는 이야기다.

 엄마와 딸 사이에 등장하는 아래층 할머니는 인생과 자연과 인륜을 조화롭게 엮어주는 도우미로서 이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할머니 또한 노년의 외로움을 이 이웃과 동행을 통해 슬기롭게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빠의 죽음에 대해 서투른 표정을 짓는 자신에 대한 힐책의 내용이 주인공 민서의 일기와 독백을 통해 드러난다.

 ‘야, 장민서. 너 진짜 나빠. 어떻게 아빠를 잊을 수 있니.’
 ‘아빠가 돌아가신 지 두 달도 안 되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친구들이랑 낄낄거리며 놀다니...’

 아이가 이렇게 아빠의 떠남을 훌쩍 스쳐가려 하는 것을 엄마가 붙든다. 남편을 떠나보낸 엄마가 느낀 상실의 고통. 죽은 자에 대한 연민과 남은 자의 고독으로 괴로워하는 엄마를 현실로 이끄는 과정을 통해 아이는 아빠를 떠나는 일이 무엇인지 겪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실의에 빠진 엄마를 혼자 생기 있는 현실로 끌어내긴 벅차다. 그래서 아래층 할머니가 등장하고, 그 할머니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텃밭을 일구는 일을 통해 극복하게 도와준다. 텃밭을 일구는 것, 즉 자연이 주는 위안과 치유의 힘을 깨친 연장자로서 할머니는 이웃을 기꺼이 돕는 역할을 한다. 또 이 시대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을 연륜과 이해로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도 처음엔 아들이 세상에서 단 줄 알고 하루하루 들어올 날만 기다렸는데 지금은 안 그렇단다. 내가 자꾸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들도 힘들고 나도 힘들어.’
 이런 고민의 과정을 거친 할머니이기에 교수가 되어 한국에 돌아오는 아들네로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살지 않고 내년에도 후년에도 우리와 함께 여기서 살 거라고 했다. 사는 건 다 각자의 몫이 있는 거고 그걸 인정해 주는 게 더 큰 사랑이라고 ...’
 
인생의 어떤 면이든 사물의 어떤 부분이든  대부분 양면성을 갖고있다. 손바닥도 앞뒤가 있고 동전도 앞뒤가 있고. 또 노년의 삶의 모습에도 양면이 있다.

 <아빠 보내기>에 등장하는 할머니처럼 아들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차분히 관조하는 사람과 <똥 싼 할머니>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아들과 자신에 맹목적인 사람. 아들의 삶을 놓아주는 사람과 아들을 붙들고 집착하는 사람. 전자는 문제의 해결사 역할을 하고 후자는 문제의 원인제공자 역할을 한다.

 그런데 동화 속에서만 후자의 경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서 후자와 같은 경우를 만났을 때 더 큰 문제가 된다. 현실은 가공의 세계보다 가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똥 싼 할머니를 관심 있게 보고 다함께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사물의 양면성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 주변 인물이 또는 바로 자신의 운명이 어느 쪽으로 뒤집힐지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똥 싼 할머니>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노인 복지과 실버 주간 보호소’

 결국 새샘이네 할머니의 치매 문제는 ‘어른들을 위한 놀이방’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그 해결책을 찾기까지 가족들 가슴에 든 멍 자욱이 빨리 없어지기를 책장을 덮으며 기원했다.

 어느 누구에게든 죽음의 문턱에 닿기 전까지 인격체로 존중받으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어느 누구든 자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에 의해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양쪽 모두의 참다운 권리와 존엄성을 이야기 하는 <똥 싼 할머니>의 진지한 고민을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 해 보고 싶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나무>에 노령화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토론 대상이 고학년인 경우 함께 읽고 토론해도 좋겠다. 전래동화 <노인을 버리는 지게>도 비교 토론 할 수 있겠고 세계 각 나라에 ‘고려장’과 같은 풍습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상상력은 현실을 왜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동화(소설)이 됨을 자연스레 깨닫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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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솔농원과 마주보는 곳에 자리잡은 영재네 솔하우스 앞에서 지윤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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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세준이와 지윤이 야외 수도에서 물놀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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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가마솥에 삶은 옥수수를 먹고있는 지윤이와 세준이 지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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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세준이와 지승이 수도가에서 물놀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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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선화아들 세준이 수도물로 물놀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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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하리하우스 장녀 지윤이와 지윤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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