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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06 하리하우스 리모델링 데크 공사
  2. 2007/05/24 어머니의 주름치마
  3. 2007/05/18 나의 어머니 "파격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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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리모델링 중인 하리하우스 2007년 6월 5일

하리하우스 2층 데크 1차 공정이 끝났다. 앞으로 페인트칠을 하면 방부목을 이용한 데크 마루와 난간 계단 등의 공사가 마무리 된다. 하리하우스 2층에 올라서면 거대한 나무 배를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따뜻하고 포근한 나무의 숨결도 느껴지고 평범했던 현관 차양(캐노피)에 새로 지붕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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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주름치마


나 어릴 때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한번은 엄마가 어딜 가셨었고 나는 엄마가 오길 기다리며 대추나무에 올라가 놀고 있었다. 아직 해가 있을 때 엄마가 오셔서 나를 찾아 뒤안으로 오셨는데, 그 때 엄마가 입으셨던 파란색 주름치마가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윗도리 모양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흰 블라우스를 입으셨던 것 같다. 늘 논밭에서, 부엌 아궁이 앞에서 만났던 엄마의 모습과 달라 그 깊은 인상이 선명히 남았으리라. 어쩌면 어머니의 주름치마와 흰 블라우스를 기억하는 건 그날  한 번의 깊은 인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보아온 어머니의 모습이 각인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마도 그 옷이 다 낡을 때까지 외출할 때마다 파란 주름치마와 흰 블라우스를 입으셨을 테니까.

세월이 흘러 어머니의 허리는 점점 굽어지고 얼굴은 검고 주름지셨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 위로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고 단아하게 내 가슴에 새겨져 있다.

어머니의 파란 주름치마와 흰 저고리가 내 마음에 떠오를 때면 난 나를 돌이켜 본다. 내 딸은 나중에 나의 어떤 모습을 기억할까. 아마 내 딸은 내 의복 중 특별 한 것 하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많은 옷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 젊은 시절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시절이 다르고 사회 환경이 다르니 어찌 내가 외출복 한 벌로 아이들 마음에 각인 될 수 있으랴. 다만 내게 바램이 있다면 내 아이들에게, 특히 내 딸에게 단아한 어머니로 기억되는 것이다.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고 그저 ‘단아함’에 대한 인상을 남겨주고 싶다. 내 마음속의 어머니처럼.

요즘은 아이들도 어른들도 옷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면 되는 옷이 아니라 날개로서의 옷의 기능이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평소 의복의 의미를 제대로 정립해 놓지 않으면 사치해지기 쉽다. 내면에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치를 꿈꾸게 된다. 결국 의복에 대한 관점 하나에도 내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내 아이들을 내면이 당당한 아이들도 키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 옷은 대부분 물려 받은 옷들이다. 하지만  작아서 못 입게 된 옷들 중에 차마 버리기 아까운 것도 많다. 누굴 물려줄까 하고 싸 놓았지만 마땅히 물려 줄 데가 없다. 오리털 잠바 같은 것은 차마 버리기 아까워서 (물론 소매 끝이 조금 낡긴 했지만, 오리털 잠바의 참 기능은 소매에 있지 않고 보온성에 있기 때문에 차마 버리지를 못했다.) 놔 두었다. 북한 어린이들에게 보내줄까 하고 경로를 알아 보았지만 적당한 방법을 못 찾았다. 인터넷에 북한에 옷 보내기 사이트가 있었지만 새 옷을 보내는 것 같았다. 참, 내가 북한 어린이들을 생각한 건 북한의 경제를 고려하여 생각한 건 아니다. 단지 북쪽이 남쪽보다 더 추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주최하는 한강 뚝섬 토요 장터에 나가 팔아볼까 생각도 하고 있다. 물물 교환의 현장도 체험할 겸 또 우리에게 필요한 물품도 구입 할 겸.

실은 나는 중고 상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출처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처가 분명한 물건들은 기쁘게 물려받고 잘 쓴다. 특히 아이들 물건은. 한 계절이 다르게 크는 아이들을 키울 땐 물물교환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돈을 아끼는 차원에서라기보다는 지구의 자원을 아낀다는 차원에서 어린이 용품을 물려 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하리 하우스의 넓은 방 하나는 어린이 용품 물물교환의 장으로 쓸 계획을 세워야 겠다. 차마 버리기 아까운 내 아이들 물건을 갖다 놓고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가고.

작은 학교 1층에 마련할 도서관, 음악실, 놀이방, 자유체험 학습실 외에 물물교환실도 마련해야 겠다. 헌 옷을 놓고 헌 옷을 가져가는 중고 시장이 아닌 추억을 놓고 새로운 추억 하나를 가져가는 아름다운 방 하나를 꼭 마련해야겠다. 그 방을 찾는 좋은 사람들과 파란 주름치마에 흰 저고리 입으신 내 어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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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직접 만드신 부뚜막과 가마솥에서 고사리 삶는 어머니^^

나의 어머니 ---- 파격의 미

고등학교 시절 국어책에 나온 수필 한 편에 대한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바로 동양화의 난 (蘭)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여린 선이지만 꼿꼿하게 위로 뻗은 난초 잎들 사이에서 휘영청 구부러진 튀는 난 잎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래로 휘어진 잎이 풍기는 미학을 수필의 작가는 ‘파격 (破格)’ 이라 하였다.

논리적이고 계획적이고 치밀해야 하는 나의 일상에서 가끔 화두처럼 떠오르는 말 ‘파격의 미’.

그저  가방 들고 학교나 잘 다니면 단 줄 알았던 시절에 느꼈던 파격 -격식을 깬다- 의 미학이 오늘 인생 고개를 몇 번 넘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의 모습인 현재의 내가 느끼는 미학과 어찌 같으랴. 여고시절 생각했던 파격은 어쩌면 반항의 결정이었다면 지금 생각하는 파격은 연륜의 담대함에서 비롯된 것이거늘 어찌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긴 지금도 나의 실상은 파격의 담대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내 안에 어리석음이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친정 어머니를 보고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뗘올리며 난 인생의 절도를 제대로 아는 분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 바로 그 ‘파격의 미’를 이야기 하려 한다.

셋째 오라보니 내외와 오라버니 지기 몇분이 친정집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오라버니가 구상중인 ‘학운산방’ 터도 둘러볼 겸 한 마을에 네 가구만 사는 동네 구경도 할 겸 봄바람도 쏘일 겸 짜인 일정이었으리라.

손님치레가 어머니차지인 걸 아는 까닭에 오빠 내외는 번차례로 전화를 걸어 삼계탕 준비를 해 갈 것이니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마시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 그런데도 어머닌 막무가내로 준비를 하셨다. 장을 보시고 순두부 해 주신다고 두부콩을 담그고 들에서 봄나물을 캐 오셨다.
나도 어머니 힘드실 걸 염려하여

“ 엄마, 엄마가 힘들게 준비해 주시면 젊은 사람들이 마음이 안 편해요. 그냥 와서 직접 해 먹게 놔두세요.”

했다.

내가 잔소리 삼아 핀잔 삼아 -나이 드니 자식들이 부모 핀잔 할 일이 많아지는 데 그런 사이를 나는 사랑한다. - 아무리 얘기해도 듣지 않으신다. 이유는 ‘그래도 그건 게 아니여.‘ 였다.  그런 게 아니기 때문에 ’내 이 시커먼 손으로 해 주는 거 먹고 가는 게 다 추억에 남을 일이여.' 하셨다. 자식들은 현재 어머니 건강을 염려하여 쉬시라 하건만 어머니는 먼 훗날의 자식들 가슴에 남을 추억을 생각하며 뭐든 해 주시려 하신 거였다. 지금의 어머니께서 자식들에게 해 주실 수 있는 건 ‘추억 만들기’ 다.

굳이 고집대로 하시는 게 못 마땅해서 퉁퉁거리다가 안되겠어서 나물 데치는 일을 거들었다. 그런데 냉이와 나물치 사이에 씀바귀가 하나  섞여 있었다

“엄마! 엄마, 이건 씀바귄데? 쓰잖아요!”

“ 아까워서 그냥 뒀어. 누가 먹으믄 뭔 나물이 쓰네 하겠지 뭐.”

어머닌 아무렇지도 않게 슬몃 웃으시기까지 했다. 아들의 손님이라고 정성으로 준비하시더니 정작 도시사람은 싫어할 쓴 나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섞어놓고도 태연하신 것.

순간 내 마음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 바로 이거다. 내 어머님의 파격 (破格) !

냉이 사이에 묻어온 씀바귀 한 뿌리를 어여쁘게 여기고 쓴 나물 한 뿌리를 향기로운 나물 사이에 거리낌 없이 섞을 수 있는 여유. 어머니의 그런 여유는 맵시있게 쪽쪽 뻗은 난초잎들 사이에 휘영청 떨구어 논 난초의 파격이었다. 주름진 얼굴에 언뜻 개구지게 슬몃 웃는 웃음마저도 세월의  덮개 없이는 만들 수 없는 여유로운 파격인 것이다.

난 오라버니나 형님 누구에게서도 쓴 나물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 자연산 씀바귀의 그 쌉싸래한 맛을 누가 맛보았을지 생각하면 나도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누구든 그 씀바귀 한 뿌리에 담겨 있는 우리 어머니의 풍류를 알까 싶어 걱정도 된다.

어머니의 “ ‘나물이 쓰구나.’ 하겠지 뭐.” 하시던 말씀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나도 저런 여유로움을 부릴 수 있을까? 하는 떨림.

내가 삶의 어려움을 겪으며 - 그래서 나를  국화 옆에서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누이라 표현했다. 이제야 그 시행의 의미가 절절히 와 닿건만. 여고생들에게 그 시를 줄줄 외우라고 하는 건 그 시를 느끼라기보다는 먼 훗날 그 시를 이해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시를 떠올리라고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손바닥 때려가며 외우라고 할만한 시이긴 하다. - 생각하는 건 바로 내 어머니다.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되었어도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다.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부지런하고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언어 구사력이 뛰어나고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지혜롭고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사람을 부릴 줄 알고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향학열이 있고,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

내가 귀감으로 여기고 진심으로 존경하며 사랑하는 내 어머님이 계셔서 인생의 처연함을 아는 분의 ‘달관의 미소’ 그 개구진 미소에서 파격의 미를 온 마음으로 느꼈다.

내가 어머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애써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머니가 주신 사랑에 대한 진정한 보답이리라.

그래서 나는 잘 살 것이다. ‘작은 학교 이야기’의 좋은 선생님으로, 작은 학교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자연의 한 모습으로 그리고 작은 학교의 첫 학생들인 나의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파격의 미를 느끼게 할 수 있는 어미의 모습으로 잘 살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의 ‘작은 학교 이야기’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 리모델링 현장에서 애쓰는 나의 막내 오라버니와 나의 물질적 후원자인 나의 남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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