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교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9/26 <해리 포터> 동경과 질투를 ...
  2. 2007/05/22 삼중당 문고에서 시공주니어까지

에휴우...

조앤 K 롤링을 떠올릴 때 저절로 나오는 감탄사입니다.

에휴우...

그녀에 대한 동경과 질투심을 동시에 쏟아 내는 감탄사입니다.

너무나 멋진 마법사 세계를 창조해 낸 그녀에 대한 동경이며, 동시에 그녀와 같은 재주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질투입니다. 그런데 그 질투의 근본은 그녀와 같은 재주가 없음에 대한 시기가 아니라 그녀가 갖게 된 돈에 대한 시기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신비한 동물 사전’과 ‘퀴디치의 역사’라는 호그와트 교과서를 사주며 그녀가 누리게 된 경제적 풍요에 대한 시기심을 좀 버릴 수 있었습니다. ‘신비한 동물 사전’과 ‘퀴디치의 역사’로 인한 수익금은 전액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쓰겠다고 하는 구절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조금 더 많이 가지려고 모으고, 없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가지려고 모으는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을 버리고 일부분을 타인을 위해 바친다는 건 아름다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알기에 그녀에 대한 질투의 일부를 존경과 애정으로 바꾸어 볼 수 있었습니다. ‘신비한 동물 사전’과 ‘퀴디치의 역사’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지 말고 사서 각 가정에 한 권 씩 비치해 두길 권하는 바입니다. ㅎ ㅎ

에휴우...

<해리 포터>를 떠올릴 때 저절로 나오는 감탄사입니다.

에휴우...

<해리 포터>에 대한 동경과 질투심을 동시에 쏟아 내는 감탄사입니다.

너무나 재미있는 <해리 포터>에 대한 동경이며, 동시에 그와 같이 재미있는 세상을 먼저 발설해버린 <해리 포터>에 대한 질투입니다. 그리고 그 질투는 곱디고운 우리 딸의 질투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마법사 이야기를 쓰면 <해리 포터>를 ‘저작권 침해’하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는 딸의 염려에 동조하는 엄마의 질투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마법의 세계를 다룬다고 저작권 침해에 해당되는 게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마법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로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만들어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불행한 예감이 <해리 포터>에 대한 질투의 근본에 깔려 있습니다.

동경과 질투가 뒤섞인 마음으로 아들과 함께 <해리 포터>를 읽습니다. 주로 내가 소리내서 읽고 아들은 듣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아들은 눈뜨자마자 <해리 포터>를 읽어 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학교에 갖고 갈 준비물 챙기는 일엔 영 관심이 없으면서 오늘은 읽다 만 <해리 포터> 아즈카반의 죄수를 읽겠다고 가방에 넣어 갔습니다. 뒷 이야기가 궁금하니까 스스로 읽어 보겠다고 가방에 넣어 가는 걸 보니 목이 아프도록 읽어 준 보람이 느껴져서 뿌듯한 아침입니다.

<해리 포터>는 학교 영어 교과서로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읽을 만한 책입니다. 그건 재미있기도 할뿐더러 아이들이 꼭 배워야 할 ‘용기와 의리’로 똘똘 뭉친 책이기 때문입니다. 악에 맞서는 해리의 힘은 영웅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늘 ‘용기’와 ‘의리’에서 출발합니다. <해리 포터>의 곳곳에서 청소년이 가져야 할 덕목인 ‘용기’와 ‘의리’라는 이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해리포터> ‘비밀의 방’에서 말포이가 헤르미온느를 잡종이라고 했습니다. 정작 본인인 헤르미온느는 그 말의 의미조차 모르건만, 론은 말포이이게 주먹을 휘두릅니다. 왜냐하면 잡종이란 단어는 친구에게 쓰는 말이 아닌 걸로 아는 론이기 때문에 친구인 헤르미온느를 잡종이라 부르는 말포이를 상대로 싸울까 말까 고민하는 여지없이 그냥 달려들어 주먹을 날려 싸우는 겁니다. 론이 달려들어 싸우는 걸 보고 해리 역시 말포이 패와 붙어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친구인 론이 분노하는 걸 보면 분명 같이 싸워줘야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 주먹질의 정당성을 논하기에 ‘의리’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말은 없습니다. 옳은 측은 옳은 측대로 그른 측은 그른 측대로 ‘의리’를 지키려고 주먹질에 가담합니다. 친구가 싸우는 걸 팔짱끼고 쳐다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론과 해리가 말포이와 말포이 친구들을 상대로 한 패싸움을 잘 한 일이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친구가 의로운 일로 싸울 땐 거들어야 한다는 엄마의 암시를 지혜로운 우리 아들이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해리포터>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말포이는 론의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을 놀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론은 말포이가 한마디만 더 하면 곧 주먹을 날릴 기세입니다. 그리고 론 곁에 있던 해리도 여차하면 주먹판에 뛰어들 자세를 취합니다. 왜냐하면 친구의 자존심을 말포이가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자존심은 곧 나의 자존심입니다. 친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녀석들에 대한 주먹질. 그 역시 ‘용기’와 ‘의리’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다보니 우리 아들의 주먹이 생각납니다. 가녀리고 부드러운 사랑스런 아들의 주먹! 아들들의 주먹이 이렇게 가녀리고 부드러운 것이 걱정될 때 엄마들은 태권도를 보내고 싶어지나 봅니다. 싸움박질 가르치는 데가 아니건만, 아들이 건너야할 청소년기의 주먹질을 생각하면 태권도가 대안으로 떠오릅니다. 이런 불손한 생각을 하다니...

내가 에리히 캐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책을 통해 친구들과의 우정과 의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리 포터> 역시 용기 있는 세 친구의 모험을 통해 우정과 의리의 가치를 일깨워 주기에 더욱 가치가 빛납니다.

그리고 해리가 더 좋은 이유는 그가 타고난 ‘용기’와 ‘의리’의 화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고민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거란다.” 덤블도어 교수가 한 번 더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네가 톰 리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해리,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통해 나타나는 거란다.”

매 순간순간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삽니다.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볼 것인가 끌 것인가, 심지어 믹스로 할 것인가 원두로 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늘 선택을 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단순한 것이 아니고 인생 행로를 나눌 수 있는 것일 때 더 많이 고민을 합니다. 그렇게 고민되는 선택의 순간에 ‘의리’를 ‘용기’있게 선택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되길 바라며 동경과 질투를 뒤섞어 <해리 포터>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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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리드 린드드랜과 에리히 케스트너의 작품들



내가 처음으로 삼중당문고를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 심 훈 의 상록수를 읽으면서였다. 국어 선생님께서 --승명자 선생님! 어디 계세요? 인도로 교회 개척사업 가셨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는데 그 후론 알 수가 없습니다. 제게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사랑의 씨를 뿌려주신 분이랍니다. 혹시 소식을 알고 계신분은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을 만나면 그저 따뜻하게 꼭 안아 드리고 싶습니다. 가나 초콜릿을 유난히 좋아 하셨던 선생님, 뵙고 싶습니다. -- 독후감 숙제로 내 주셔서 읽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 때 느꼈던 책읽는 기쁨이 가슴을 파고 든다. 상록수 이후 이광수의 책을 읽었다. 유정, 무정, 흙, 사랑. 이후 난 학교 앞 분식집에서 파는 햄버거보다 책방에 꽂혀있는 삼중당문고를 더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한 삼중당문고에 대한 사랑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이어졌다. 한 때 내 희망은 삼중당문고 전권을 내 책장에 꽂아놓는 거였다. 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지 못했다. 삼중당 문고에 대한 꿈을 다 이루기 전에 다른 잡다한 책들에로 관심이 옳아갔기 때문이다.


지윤이 지승이 책 때문에 꽂을 자리가 없어져서 어른들 책은 박스에 싸 놓았는데, 이제 하리하우스가 완성되면 어떻게든 책꽂이를 마련해서 나의 삼중당문고도 꽂아놓고 싶다. 같은 시대의 추억을 지닌 벗이 오면 한 권 뽑아 주리라. 금수산 산자락 밑에서 읽으라고.


아마도 전집을 좋아하는 것이 내 성향인가 보다. 얼마 전에 시공주니어 베스트문고 50을 구했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물론 내가 먼저 읽어야 이야기가 통하므로 난 더 열심히 읽고 있다. 오늘로서 30권을 읽었다. 빨리 나머지 20권도 읽고 싶은 욕심에 -너무 재미있어서- 그 전에 읽던 반지의 제왕도 5권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나를 부르고 있지만 잠시 기다리라 하는 수밖에.



1.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아스트리드 린드그랜 지음


오늘은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를 읽었다.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뒤죽박죽 별장에 살고 있는 삐삐의 원작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라스무스와 폰투스> 라는 작품을  읽으면서도 작가의 유머감각에 반했는데, 역시 거칠 것 없는 삐삐의 입을 통해 나오는 유머가 책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밥도 안 해도 되고, 빨래도 안 해도 되고, 청소도 안 해도 되고 애들도 안 챙겨도 되는 날이 한 일주일만 된다면 -그런 날이 주부들에게 주어지는 휴가일 텐데, 아무래도 너무 욕심이 크지?  - 나머지 20권을 후딱 읽어 치울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아이들 돌보고 틈틈이 읽는 재미가 더 감칠맛 나고 좋기도 하다. 이제 애들이 유치원에서 올 시간이다. 마중 나가야지.


생각난 김에 마저 읽지 못한 삼중당문고 시리즈를 헌책방 세원북에서 찾아봐야겠다. 지금은 그 시절 삼중당 문고는 교보에도 없으므로...





2. <하늘을 나는 교실> <내가 어렸을 적에> -에리히 케스트너


얼마 전 한 일간신문에서 클래식 음악 평론가에게 인터뷰를 한 내용을 읽었다.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신 분이 바로 자신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표제만 읽고 나는 ‘아 이분의 어머니도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신 분이신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어머니께서 직접 음악을 연주해 주신 것이 아니고 세 번에 걸쳐 클래식 대전집을 사 주셨던 기억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전집은 누나들이 결혼을 하면서 갖고 갔고 그래서 다시 세 번째로 클래식 대전집을 사서 자신에게 주셨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어머니께서 자신에게 베푸셨던 건 클래식 대전집이 아니고 음악에 대한 영감이라고 했다. 물질을 받으며 정신을 읽을 주 아는 아들이었기에 같은 전집을 서 번씩 사 주셨던 어머니의 뜻이 헛되지 않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한 인간의 내면이 성장하는 데 어머니의 존재가 미치는 영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 중의 하나가 <하늘을 나는 교실>이다. 에리히 케스트너라는 독일 작가의 작품인데 학교사회 안에서 빚어지는 청소년들의 우정, 선생님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과 제자에 대한 진정한 사랑, 그리고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갈등과 그 갈등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역시 세계적 작가의 작품답다는 감동과 함께 어른들도 못 읽어 본 사람이 있으면 꼭 읽어 보시라고 하고 싶다. 내 마음이 촉촉하게 젖음과 동시에 아들딸이 이렇게 크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 것 같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있는 겨울방학에 집으로 갈 차비를 보내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마르틴의 엄마가 마르틴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참지 못하고 훌쩍거렸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마르틴처럼 아들의 입장이 아니라 엄마의 입장에서 읽었기 때문에 더 가슴 아팠던 것 같다.


글 속에는 작가의 경험이 여기 저기 녹아있게 마련이다.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했던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였기에 마르틴의 마음과 마르틴 엄마의 마음을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었으리라.


사실 <하늘을 나는 교실>의 -머리말 하나-는 약간 엉뚱하게 시작된다. 동화 작가인 내게 어머니께서 ‘올해에도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못 쓰면 선물을 안 줄 테다.’  하고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나는  8월에도 눈이 보이는 츄크슈피체 산기슭으로 글을 쓰러 와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머리말 하나-의 내용이다. 참 이해가 안 되었다. 다 큰 아들에게 크리스마스에 대한 동화 한 편을 못 쓰면 선물을 주지 않겠다고 선전포고 하는 어머니는 뭐며, 어머니의 선전포고가 무서워 한 여름에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중 인물은 도데체 뭘 의미하는 걸까 하는 의문에 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말하는 마마보이에 대한 언급일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하고 <하늘을 나는 교실>을 덮었는데, 아무튼 어머니 등쌀에 못 이겨 쓴 작품이 너무 아름답다는 거다. 결국 어머니 등쌀이 아들에 대한 관심과 격려의 몫을 단단히 해 낸 것이다.


항상 머리말을 재미있게 쓰는 에리히 케스트너가 그의 가장 빼어난 작품의 머리말에 등장시킨 것이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내가 어렸을 적에>를 읽고 알았다. 에리히 케스트너에게 있어서 어머니란 존재는 바로 문학적 영감의 보고였던 것이다. 케스트너가 작가로서 가지는 상상력과 감수성, 직관력과 판단의 근거는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얻게 된 선물이었다. 그런 선물을 받은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그의 책 <에밀과 탐정들> <에밀과 세 쌍둥이>에서도 보여준다. 아들의 글 속에서 아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 어머니의 모습.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에>를 읽은 후엔 아이들에게 인생을 아름답게 해 줄 영감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하나를 더 갖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있다. 그 어머니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배워간다. 말투와 자잘한  습관, 먹는 것에 대한 기호까지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때론 생존의 차원이 아닌 영혼의 경지에 대한 모범을 어머니를 통해 보기도 한다. 

도덕적 신념이나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어머니를 품고 사는 자식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 그런 아름다운 자식으로서 살아가기를 나는 원한다. 나는 내 어머니를 진정 사랑하고 존경하므로.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쯤 어머니께서 환갑기념으로 동남아를 다녀오신 적이 있다. 그 때 방문한 나라 중 싱가포르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표현 하셨다.


“ 그 나라는 담배꽁초 버려도 벌금이 많데. 얼마나 깨끗하게 잘 해놨는지 몰라. 그 나라를 보니 ‘아하, 솔고개도 잘 가꿔서 사람들이 오도록 만들어야겠다.’ 이런 맘이 들데.”


 그 후로 어머님은 해외여행이라는 걸 한 번도 더 다녀오신 적이 없다. 대신 솔고개 자투리 땅엔 두릅을 심고 산에서 취나물을 한 포기 한 포기 캐다 심어 취나물 밭을 만드셨다. 사람 오는 걸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찾아 손이 오시면 어머닌 두릅을 따 주시고 취나물을 데쳐 나물을 무쳐 주신다. 그리고 그 두릅과 취나물을 팔아 어린이 날 선물로 손주들을 위해 절편을 뽑아다 주신다. 그런 어머니의 손길 자체가 나에겐 영감의 보고이다.


나 또한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간 것 말고는 그 흔한 동남아 한 번을 못 가봤다. 그래도 해외 여행 하는 걸 낙으로 삼는 사람과 비교하여 나의 삶이 짜증스럽지 않은 것은 내 어머니의 신념을 내가 존경하기 때문이다. 내 고장을 아름답게 가꿔서 사람들이 오게 만들어야지 하고 말씀하신 어머니의 마음속엔 가 보시지 못한 미지의 세상마저도 품을 수 있는 기개가 있음을 자랑스러워 하는 딸이기에 나는 해외여행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도 교육적 공간 하나를 잘 가꿔 사람들이 오게 만들어야지 하는 희망 하나를 품게 되었고 이제 그 희망을 ‘작은 학교 이야기’를 통해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내게 희망을 심어 주신 나의 어머니께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 아이들에게 희망을 품게 해 주는 엄마가 되어야지 라고...


어머니를 도와 두릅을 따 본 적이 있다. 그 때 ‘언젠가 두릅에 대한 시를 써야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 떠오른 시 행 하나를 두릅을 먹을 때 마다 생각한다.


-봄 하늘을 똑똑 분질러 따듯

두릅을 딴다. -


봄에 두릅나무는 길쭉한 가시 막대기처럼 일자로 서있고 두릅 순은 그 꼭대기에서 피어난다. 키 크고 메마른 줄기 끝에 피어나는 두릅 새순을 딸 땐 까치발을 하고  서야 할 때도 있는데, 아래서 올려다 본 두릅의 배경은 푸른 하늘이었다. 서정주의 시처럼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기에 좋은 눈부신 봄 하늘. 두릅 몇 송이 따며 바라본 솔고개 봄 하늘에 대한 추억이 가슴 저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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