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주름치마


나 어릴 때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한번은 엄마가 어딜 가셨었고 나는 엄마가 오길 기다리며 대추나무에 올라가 놀고 있었다. 아직 해가 있을 때 엄마가 오셔서 나를 찾아 뒤안으로 오셨는데, 그 때 엄마가 입으셨던 파란색 주름치마가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윗도리 모양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흰 블라우스를 입으셨던 것 같다. 늘 논밭에서, 부엌 아궁이 앞에서 만났던 엄마의 모습과 달라 그 깊은 인상이 선명히 남았으리라. 어쩌면 어머니의 주름치마와 흰 블라우스를 기억하는 건 그날  한 번의 깊은 인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보아온 어머니의 모습이 각인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마도 그 옷이 다 낡을 때까지 외출할 때마다 파란 주름치마와 흰 블라우스를 입으셨을 테니까.

세월이 흘러 어머니의 허리는 점점 굽어지고 얼굴은 검고 주름지셨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 위로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고 단아하게 내 가슴에 새겨져 있다.

어머니의 파란 주름치마와 흰 저고리가 내 마음에 떠오를 때면 난 나를 돌이켜 본다. 내 딸은 나중에 나의 어떤 모습을 기억할까. 아마 내 딸은 내 의복 중 특별 한 것 하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많은 옷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 젊은 시절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시절이 다르고 사회 환경이 다르니 어찌 내가 외출복 한 벌로 아이들 마음에 각인 될 수 있으랴. 다만 내게 바램이 있다면 내 아이들에게, 특히 내 딸에게 단아한 어머니로 기억되는 것이다.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고 그저 ‘단아함’에 대한 인상을 남겨주고 싶다. 내 마음속의 어머니처럼.

요즘은 아이들도 어른들도 옷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면 되는 옷이 아니라 날개로서의 옷의 기능이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평소 의복의 의미를 제대로 정립해 놓지 않으면 사치해지기 쉽다. 내면에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치를 꿈꾸게 된다. 결국 의복에 대한 관점 하나에도 내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내 아이들을 내면이 당당한 아이들도 키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 옷은 대부분 물려 받은 옷들이다. 하지만  작아서 못 입게 된 옷들 중에 차마 버리기 아까운 것도 많다. 누굴 물려줄까 하고 싸 놓았지만 마땅히 물려 줄 데가 없다. 오리털 잠바 같은 것은 차마 버리기 아까워서 (물론 소매 끝이 조금 낡긴 했지만, 오리털 잠바의 참 기능은 소매에 있지 않고 보온성에 있기 때문에 차마 버리지를 못했다.) 놔 두었다. 북한 어린이들에게 보내줄까 하고 경로를 알아 보았지만 적당한 방법을 못 찾았다. 인터넷에 북한에 옷 보내기 사이트가 있었지만 새 옷을 보내는 것 같았다. 참, 내가 북한 어린이들을 생각한 건 북한의 경제를 고려하여 생각한 건 아니다. 단지 북쪽이 남쪽보다 더 추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주최하는 한강 뚝섬 토요 장터에 나가 팔아볼까 생각도 하고 있다. 물물 교환의 현장도 체험할 겸 또 우리에게 필요한 물품도 구입 할 겸.

실은 나는 중고 상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출처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처가 분명한 물건들은 기쁘게 물려받고 잘 쓴다. 특히 아이들 물건은. 한 계절이 다르게 크는 아이들을 키울 땐 물물교환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돈을 아끼는 차원에서라기보다는 지구의 자원을 아낀다는 차원에서 어린이 용품을 물려 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하리 하우스의 넓은 방 하나는 어린이 용품 물물교환의 장으로 쓸 계획을 세워야 겠다. 차마 버리기 아까운 내 아이들 물건을 갖다 놓고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가고.

작은 학교 1층에 마련할 도서관, 음악실, 놀이방, 자유체험 학습실 외에 물물교환실도 마련해야 겠다. 헌 옷을 놓고 헌 옷을 가져가는 중고 시장이 아닌 추억을 놓고 새로운 추억 하나를 가져가는 아름다운 방 하나를 꼭 마련해야겠다. 그 방을 찾는 좋은 사람들과 파란 주름치마에 흰 저고리 입으신 내 어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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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리드 린드드랜과 에리히 케스트너의 작품들



내가 처음으로 삼중당문고를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 심 훈 의 상록수를 읽으면서였다. 국어 선생님께서 --승명자 선생님! 어디 계세요? 인도로 교회 개척사업 가셨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는데 그 후론 알 수가 없습니다. 제게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사랑의 씨를 뿌려주신 분이랍니다. 혹시 소식을 알고 계신분은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을 만나면 그저 따뜻하게 꼭 안아 드리고 싶습니다. 가나 초콜릿을 유난히 좋아 하셨던 선생님, 뵙고 싶습니다. -- 독후감 숙제로 내 주셔서 읽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 때 느꼈던 책읽는 기쁨이 가슴을 파고 든다. 상록수 이후 이광수의 책을 읽었다. 유정, 무정, 흙, 사랑. 이후 난 학교 앞 분식집에서 파는 햄버거보다 책방에 꽂혀있는 삼중당문고를 더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한 삼중당문고에 대한 사랑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이어졌다. 한 때 내 희망은 삼중당문고 전권을 내 책장에 꽂아놓는 거였다. 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지 못했다. 삼중당 문고에 대한 꿈을 다 이루기 전에 다른 잡다한 책들에로 관심이 옳아갔기 때문이다.


지윤이 지승이 책 때문에 꽂을 자리가 없어져서 어른들 책은 박스에 싸 놓았는데, 이제 하리하우스가 완성되면 어떻게든 책꽂이를 마련해서 나의 삼중당문고도 꽂아놓고 싶다. 같은 시대의 추억을 지닌 벗이 오면 한 권 뽑아 주리라. 금수산 산자락 밑에서 읽으라고.


아마도 전집을 좋아하는 것이 내 성향인가 보다. 얼마 전에 시공주니어 베스트문고 50을 구했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물론 내가 먼저 읽어야 이야기가 통하므로 난 더 열심히 읽고 있다. 오늘로서 30권을 읽었다. 빨리 나머지 20권도 읽고 싶은 욕심에 -너무 재미있어서- 그 전에 읽던 반지의 제왕도 5권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나를 부르고 있지만 잠시 기다리라 하는 수밖에.



1.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아스트리드 린드그랜 지음


오늘은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를 읽었다.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뒤죽박죽 별장에 살고 있는 삐삐의 원작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라스무스와 폰투스> 라는 작품을  읽으면서도 작가의 유머감각에 반했는데, 역시 거칠 것 없는 삐삐의 입을 통해 나오는 유머가 책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밥도 안 해도 되고, 빨래도 안 해도 되고, 청소도 안 해도 되고 애들도 안 챙겨도 되는 날이 한 일주일만 된다면 -그런 날이 주부들에게 주어지는 휴가일 텐데, 아무래도 너무 욕심이 크지?  - 나머지 20권을 후딱 읽어 치울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아이들 돌보고 틈틈이 읽는 재미가 더 감칠맛 나고 좋기도 하다. 이제 애들이 유치원에서 올 시간이다. 마중 나가야지.


생각난 김에 마저 읽지 못한 삼중당문고 시리즈를 헌책방 세원북에서 찾아봐야겠다. 지금은 그 시절 삼중당 문고는 교보에도 없으므로...





2. <하늘을 나는 교실> <내가 어렸을 적에> -에리히 케스트너


얼마 전 한 일간신문에서 클래식 음악 평론가에게 인터뷰를 한 내용을 읽었다.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신 분이 바로 자신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표제만 읽고 나는 ‘아 이분의 어머니도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신 분이신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어머니께서 직접 음악을 연주해 주신 것이 아니고 세 번에 걸쳐 클래식 대전집을 사 주셨던 기억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전집은 누나들이 결혼을 하면서 갖고 갔고 그래서 다시 세 번째로 클래식 대전집을 사서 자신에게 주셨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어머니께서 자신에게 베푸셨던 건 클래식 대전집이 아니고 음악에 대한 영감이라고 했다. 물질을 받으며 정신을 읽을 주 아는 아들이었기에 같은 전집을 서 번씩 사 주셨던 어머니의 뜻이 헛되지 않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한 인간의 내면이 성장하는 데 어머니의 존재가 미치는 영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 중의 하나가 <하늘을 나는 교실>이다. 에리히 케스트너라는 독일 작가의 작품인데 학교사회 안에서 빚어지는 청소년들의 우정, 선생님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과 제자에 대한 진정한 사랑, 그리고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갈등과 그 갈등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역시 세계적 작가의 작품답다는 감동과 함께 어른들도 못 읽어 본 사람이 있으면 꼭 읽어 보시라고 하고 싶다. 내 마음이 촉촉하게 젖음과 동시에 아들딸이 이렇게 크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 것 같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있는 겨울방학에 집으로 갈 차비를 보내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마르틴의 엄마가 마르틴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참지 못하고 훌쩍거렸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마르틴처럼 아들의 입장이 아니라 엄마의 입장에서 읽었기 때문에 더 가슴 아팠던 것 같다.


글 속에는 작가의 경험이 여기 저기 녹아있게 마련이다.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했던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였기에 마르틴의 마음과 마르틴 엄마의 마음을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었으리라.


사실 <하늘을 나는 교실>의 -머리말 하나-는 약간 엉뚱하게 시작된다. 동화 작가인 내게 어머니께서 ‘올해에도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못 쓰면 선물을 안 줄 테다.’  하고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나는  8월에도 눈이 보이는 츄크슈피체 산기슭으로 글을 쓰러 와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머리말 하나-의 내용이다. 참 이해가 안 되었다. 다 큰 아들에게 크리스마스에 대한 동화 한 편을 못 쓰면 선물을 주지 않겠다고 선전포고 하는 어머니는 뭐며, 어머니의 선전포고가 무서워 한 여름에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중 인물은 도데체 뭘 의미하는 걸까 하는 의문에 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말하는 마마보이에 대한 언급일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하고 <하늘을 나는 교실>을 덮었는데, 아무튼 어머니 등쌀에 못 이겨 쓴 작품이 너무 아름답다는 거다. 결국 어머니 등쌀이 아들에 대한 관심과 격려의 몫을 단단히 해 낸 것이다.


항상 머리말을 재미있게 쓰는 에리히 케스트너가 그의 가장 빼어난 작품의 머리말에 등장시킨 것이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내가 어렸을 적에>를 읽고 알았다. 에리히 케스트너에게 있어서 어머니란 존재는 바로 문학적 영감의 보고였던 것이다. 케스트너가 작가로서 가지는 상상력과 감수성, 직관력과 판단의 근거는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얻게 된 선물이었다. 그런 선물을 받은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그의 책 <에밀과 탐정들> <에밀과 세 쌍둥이>에서도 보여준다. 아들의 글 속에서 아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 어머니의 모습.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에>를 읽은 후엔 아이들에게 인생을 아름답게 해 줄 영감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하나를 더 갖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있다. 그 어머니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배워간다. 말투와 자잘한  습관, 먹는 것에 대한 기호까지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때론 생존의 차원이 아닌 영혼의 경지에 대한 모범을 어머니를 통해 보기도 한다. 

도덕적 신념이나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어머니를 품고 사는 자식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 그런 아름다운 자식으로서 살아가기를 나는 원한다. 나는 내 어머니를 진정 사랑하고 존경하므로.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쯤 어머니께서 환갑기념으로 동남아를 다녀오신 적이 있다. 그 때 방문한 나라 중 싱가포르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표현 하셨다.


“ 그 나라는 담배꽁초 버려도 벌금이 많데. 얼마나 깨끗하게 잘 해놨는지 몰라. 그 나라를 보니 ‘아하, 솔고개도 잘 가꿔서 사람들이 오도록 만들어야겠다.’ 이런 맘이 들데.”


 그 후로 어머님은 해외여행이라는 걸 한 번도 더 다녀오신 적이 없다. 대신 솔고개 자투리 땅엔 두릅을 심고 산에서 취나물을 한 포기 한 포기 캐다 심어 취나물 밭을 만드셨다. 사람 오는 걸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찾아 손이 오시면 어머닌 두릅을 따 주시고 취나물을 데쳐 나물을 무쳐 주신다. 그리고 그 두릅과 취나물을 팔아 어린이 날 선물로 손주들을 위해 절편을 뽑아다 주신다. 그런 어머니의 손길 자체가 나에겐 영감의 보고이다.


나 또한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간 것 말고는 그 흔한 동남아 한 번을 못 가봤다. 그래도 해외 여행 하는 걸 낙으로 삼는 사람과 비교하여 나의 삶이 짜증스럽지 않은 것은 내 어머니의 신념을 내가 존경하기 때문이다. 내 고장을 아름답게 가꿔서 사람들이 오게 만들어야지 하고 말씀하신 어머니의 마음속엔 가 보시지 못한 미지의 세상마저도 품을 수 있는 기개가 있음을 자랑스러워 하는 딸이기에 나는 해외여행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도 교육적 공간 하나를 잘 가꿔 사람들이 오게 만들어야지 하는 희망 하나를 품게 되었고 이제 그 희망을 ‘작은 학교 이야기’를 통해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내게 희망을 심어 주신 나의 어머니께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 아이들에게 희망을 품게 해 주는 엄마가 되어야지 라고...


어머니를 도와 두릅을 따 본 적이 있다. 그 때 ‘언젠가 두릅에 대한 시를 써야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 떠오른 시 행 하나를 두릅을 먹을 때 마다 생각한다.


-봄 하늘을 똑똑 분질러 따듯

두릅을 딴다. -


봄에 두릅나무는 길쭉한 가시 막대기처럼 일자로 서있고 두릅 순은 그 꼭대기에서 피어난다. 키 크고 메마른 줄기 끝에 피어나는 두릅 새순을 딸 땐 까치발을 하고  서야 할 때도 있는데, 아래서 올려다 본 두릅의 배경은 푸른 하늘이었다. 서정주의 시처럼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기에 좋은 눈부신 봄 하늘. 두릅 몇 송이 따며 바라본 솔고개 봄 하늘에 대한 추억이 가슴 저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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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직접 만드신 부뚜막과 가마솥에서 고사리 삶는 어머니^^

나의 어머니 ---- 파격의 미

고등학교 시절 국어책에 나온 수필 한 편에 대한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바로 동양화의 난 (蘭)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여린 선이지만 꼿꼿하게 위로 뻗은 난초 잎들 사이에서 휘영청 구부러진 튀는 난 잎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래로 휘어진 잎이 풍기는 미학을 수필의 작가는 ‘파격 (破格)’ 이라 하였다.

논리적이고 계획적이고 치밀해야 하는 나의 일상에서 가끔 화두처럼 떠오르는 말 ‘파격의 미’.

그저  가방 들고 학교나 잘 다니면 단 줄 알았던 시절에 느꼈던 파격 -격식을 깬다- 의 미학이 오늘 인생 고개를 몇 번 넘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의 모습인 현재의 내가 느끼는 미학과 어찌 같으랴. 여고시절 생각했던 파격은 어쩌면 반항의 결정이었다면 지금 생각하는 파격은 연륜의 담대함에서 비롯된 것이거늘 어찌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긴 지금도 나의 실상은 파격의 담대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내 안에 어리석음이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친정 어머니를 보고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뗘올리며 난 인생의 절도를 제대로 아는 분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 바로 그 ‘파격의 미’를 이야기 하려 한다.

셋째 오라보니 내외와 오라버니 지기 몇분이 친정집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오라버니가 구상중인 ‘학운산방’ 터도 둘러볼 겸 한 마을에 네 가구만 사는 동네 구경도 할 겸 봄바람도 쏘일 겸 짜인 일정이었으리라.

손님치레가 어머니차지인 걸 아는 까닭에 오빠 내외는 번차례로 전화를 걸어 삼계탕 준비를 해 갈 것이니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마시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 그런데도 어머닌 막무가내로 준비를 하셨다. 장을 보시고 순두부 해 주신다고 두부콩을 담그고 들에서 봄나물을 캐 오셨다.
나도 어머니 힘드실 걸 염려하여

“ 엄마, 엄마가 힘들게 준비해 주시면 젊은 사람들이 마음이 안 편해요. 그냥 와서 직접 해 먹게 놔두세요.”

했다.

내가 잔소리 삼아 핀잔 삼아 -나이 드니 자식들이 부모 핀잔 할 일이 많아지는 데 그런 사이를 나는 사랑한다. - 아무리 얘기해도 듣지 않으신다. 이유는 ‘그래도 그건 게 아니여.‘ 였다.  그런 게 아니기 때문에 ’내 이 시커먼 손으로 해 주는 거 먹고 가는 게 다 추억에 남을 일이여.' 하셨다. 자식들은 현재 어머니 건강을 염려하여 쉬시라 하건만 어머니는 먼 훗날의 자식들 가슴에 남을 추억을 생각하며 뭐든 해 주시려 하신 거였다. 지금의 어머니께서 자식들에게 해 주실 수 있는 건 ‘추억 만들기’ 다.

굳이 고집대로 하시는 게 못 마땅해서 퉁퉁거리다가 안되겠어서 나물 데치는 일을 거들었다. 그런데 냉이와 나물치 사이에 씀바귀가 하나  섞여 있었다

“엄마! 엄마, 이건 씀바귄데? 쓰잖아요!”

“ 아까워서 그냥 뒀어. 누가 먹으믄 뭔 나물이 쓰네 하겠지 뭐.”

어머닌 아무렇지도 않게 슬몃 웃으시기까지 했다. 아들의 손님이라고 정성으로 준비하시더니 정작 도시사람은 싫어할 쓴 나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섞어놓고도 태연하신 것.

순간 내 마음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 바로 이거다. 내 어머님의 파격 (破格) !

냉이 사이에 묻어온 씀바귀 한 뿌리를 어여쁘게 여기고 쓴 나물 한 뿌리를 향기로운 나물 사이에 거리낌 없이 섞을 수 있는 여유. 어머니의 그런 여유는 맵시있게 쪽쪽 뻗은 난초잎들 사이에 휘영청 떨구어 논 난초의 파격이었다. 주름진 얼굴에 언뜻 개구지게 슬몃 웃는 웃음마저도 세월의  덮개 없이는 만들 수 없는 여유로운 파격인 것이다.

난 오라버니나 형님 누구에게서도 쓴 나물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 자연산 씀바귀의 그 쌉싸래한 맛을 누가 맛보았을지 생각하면 나도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누구든 그 씀바귀 한 뿌리에 담겨 있는 우리 어머니의 풍류를 알까 싶어 걱정도 된다.

어머니의 “ ‘나물이 쓰구나.’ 하겠지 뭐.” 하시던 말씀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나도 저런 여유로움을 부릴 수 있을까? 하는 떨림.

내가 삶의 어려움을 겪으며 - 그래서 나를  국화 옆에서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누이라 표현했다. 이제야 그 시행의 의미가 절절히 와 닿건만. 여고생들에게 그 시를 줄줄 외우라고 하는 건 그 시를 느끼라기보다는 먼 훗날 그 시를 이해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시를 떠올리라고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손바닥 때려가며 외우라고 할만한 시이긴 하다. - 생각하는 건 바로 내 어머니다.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되었어도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다.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부지런하고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언어 구사력이 뛰어나고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지혜롭고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사람을 부릴 줄 알고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향학열이 있고, 내가 내 어머니만큼만...... .

내가 귀감으로 여기고 진심으로 존경하며 사랑하는 내 어머님이 계셔서 인생의 처연함을 아는 분의 ‘달관의 미소’ 그 개구진 미소에서 파격의 미를 온 마음으로 느꼈다.

내가 어머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애써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머니가 주신 사랑에 대한 진정한 보답이리라.

그래서 나는 잘 살 것이다. ‘작은 학교 이야기’의 좋은 선생님으로, 작은 학교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자연의 한 모습으로 그리고 작은 학교의 첫 학생들인 나의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파격의 미를 느끼게 할 수 있는 어미의 모습으로 잘 살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의 ‘작은 학교 이야기’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 리모델링 현장에서 애쓰는 나의 막내 오라버니와 나의 물질적 후원자인 나의 남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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