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키우고 싶어요!

<내 친구 윈딕시>  <아주 작은 개 치키티토>  <라스무스와 폰투스> <내 친구 커트니>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한 번쯤은 개에 대한 열망을 품는 것 같다. 거리에서 줄에 묶이지 않은 개를 만나면 은연중에 경계를 하게 되는데, 이는 도시화된 개의 폭력성이 보이지 않게 행인들에게 위압감을 주기 때문이리라. 옆집 개도 아니고 뒷집 개도 아닌 정체성 없는 개가 주는 공포는 ‘광견병’이라는 이름 때문에 섬뜩함을 더한다.


그런데, 슈퍼마켓에 들어와 난리를 피우는 덩치 큰 개를 한 여자아이가 자기 개라며 겁도 없이 집으로 데리고 온다. 물론 개를 위한 갑작스런 선택이었다. 그 후로 그 개와 한 소녀와의 우정이 시작되고 그 개를 인연으로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가 <내 친구 윈딕시>다. 이 책을 읽고나면 개털 알레르기 같은 것 무시하고 내 딸에게 개를 한 마리 사 줄까 하는 마음이 살짝 든다.


<아주 작은 개 치키티토>를 부모의 입장에서 읽으면 ‘그래 이렇게까지 원하는 데 한 마리 사주자.’하는 결심이 막 서려고 한다. 개털로 인한 알레르기보다 정서 불안정이 더 큰 문제지 하며 아이 손을 잡고 애견센터로 갈지도 모른다.


<라스무스와 폰투스>의 주인공인 두 소년이 개 한 마리의 목숨을 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도둑들에 대항하는 모험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 역시 개가 아이들에게는 ‘개’ 이상의 무엇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위의 세 책을 모두 읽은 후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개를 키우게 해 준 건 아니다. 다만 아이들에게는 분수처럼 솟구치는 살아 움직이는 것에 대한 열정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 열정의 대상으로 가장 적당한 것이 바로 ‘강아지’라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를 키우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를 설명할 때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사람에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 주어진 것 같다. 그래서 자식들을 다 떠나보내고 남은 노부부들 중에 후손들에게 쏟고 남은 여분의 사랑을 개를 키우는 데 쏟는가 보다.

형제자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소비되어야 할 사랑을 쏟을 곳 없이 혼자 크는 아이들은 자신 안에서 넘치는 사랑을 ‘독점’이라는 형식으로 분출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이  독점에 대한 욕구가 역으로  ‘왕따’를 만드는 게 아닐까. 옛날에 형제가 대여섯 적어도 서넛이 되던 시절엔 형제들끼리의 갈등도 해결하기 벅찼으므로 굳이 친구관계에서 애정의 서열이나 우위를 가릴 틈이 없었다. 그러니 그때는 지금처럼 친구관계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고 그러니 친구를 따돌릴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형제자매 없이 혼자 크는 아이가 늘고, 그런 경우 자신 안에 넘치는 친구에 대한 열정을 역으로 다른 친구를 따돌림으로써 해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보다 친구를 따돌리는 아이에게 다듬어지지 않은 사랑을 쏟을 대상으로 사랑스런 개 한 마리를! 안겨줘 보는 건 어떨까. 넘치는 사랑을 받을 때 보다 정신없이 사랑을 쏟으면서 얻는 게 더 많은 법이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개를 키우기 힘든 경우 <내 친구 커트니> -존 버닝햄. 비룡소-를 함께 읽으며 개에 대한 환상적이고 아련한 추억하나 만들어 주면 어떨까, 어느 순간이고 우리 가족을 지켜 줄 수호천사로서의 커트니. 개를 사달라고 조를 때마다 <내 친구 커트니>를 읽어주면 자연스레 마음속에 커트니를 키우게 될 것 같다.

아이가 애완동물을 간절히 원할 때 가만 생각해 보자. 우리 아이 마음에 나는 얼마만한 키로 자라있는 지를. 아이를 더 많이 안아 주고 손잡아 주고 바라봐 주고, 반대로 아이가 부모를 안아볼 기회를 주고 손잡을 시간을 주고 바라볼 여유를 주는 것이 서로의 마음에서 서로를 키우는 방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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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람> <달님 안녕!>과 함께 하는 달맞이

나는 평소에도 송편을 자주 하는 편이다. 쑥과 쌀을 섞어 빻은 가루를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아이들 간식거리가 없을 때 꺼내서 송편을 한다. 송편 소는 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깨와 설탕을 넣고 하는 깨 송편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강낭콩을 통째로 넣고 하는 콩 송편이 싫어서 어떻게 하면 밤이 들은 송편을 골라 먹을까를 고심했는데, 우리 아이들은 밤 송편이 나오면 엄마가 제발  좀 먹어 달라 하고 깨 송편이 나오면 좋다고 먹는다. 깨는 늘 있는 양념이라 송편 소로 넣기가 좋고 또 단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단 맛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어서 좋다. 이번 추석에도 송편을 만들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나만의 개성있는 송편 만들기가 아이들 즐거움이다. 그러나 차츰 추석이라고 송편을 만드는 집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얼마 먹지도 않는 것 많이 해서 하느라고 고생하! 고, 안 먹고 남은 것 은 처치곤란이라 고생. 그러니 아예 먹을 만큼 사서 맛있게 먹고 남는 음식 없게 하자는 것이 송편을 사는 이유,  그 합리성을 비난할 이유가 없다.

그래도 추석인데 뭔가 1% 부족하다 싶은 마음을 책으로 채워보는 건 어떨까? 바로 그림책 <달사람> - 토미 웅거러 작, 비룡소 출판- 이다. 보림 출판사의 <달님 안녕!>도 좋다.


콩닥콩닥 절구에 방아를 찧는 토끼도 없고 금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도 달엔 없다. 토끼와 계수나무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일로 인류는 인간 행보의 위대함을 표방했다. 그러나 달 표면에서 휘날리던 인간의 깃발도 달에 대한 흠모의 정마저 날려버리진 못했다. 해마다 추석날 밤이 되면  저녁상이며 조촐한 술상을 정리한 후엔 달님을 찾아 하늘을 본다. 옅으면 옅은 대로, 묽으면 묽은 대로, 구름에 가리면 가린  대로, 크고 환하면 크고 환한 대로 달은 곧 ‘님’이 되어 가슴으로 마주치게 된다.

때론 이론 욕심 다 내면 안 되지 싶을 만큼 많이 읊조리고 때론 한 가지 말만 간절히 전한다. 다분히 비이성적인 달님과의 교감이 헛헛하거나 비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달님을 향한  발원의 내용이 이기적이지 않기 때문일 거다. 달님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내용은 ‘내가’보다 ‘누가’에 대한 것들이 더 많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 보다 ‘누가 어떻게’ 라고 하게 된다. 그리하여 달님을 향한 기도는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환원되어 돌아온다. 그 사랑으로 추석날 달맞이는 유지되는 것이리라.


비룡소 그림동화 <달사람>은 달에 대한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 준다. 바로 달에 사는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다.

투명하고 물렁물렁하고 동그라미 안에 착 구부리고 들어앉아 지구를 내려다보는 달사람. 그는 밝은 불빛아래서 음악을 연주하고 춤추며 노는 지구인들처럼 놀아보고 싶어서 유성 꼬리를 붙들고 지구로 왔다. 그러나 지구 사람과 다른 모습 때문에 철창에 갇히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우주선을 타고 다시 달로 돌아가게 된다. 이제 달사람은 지구인들의 무도회를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고 달에 머물러 있다.

<달사람>을 읽은 아이들은 달님을 보며 달사람의 윤곽을 찾을지도 모른다. 저긴 둥그런 얼굴, 저긴 위로 구부린 다리, 저긴 동그란 달 안에 구겨 넣은 팔...

그런 모습의 달사람에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지 않는다. 다만 반가운 친구를 부르듯 큰 소리로 부르며 인사할 것이다.

“달사람, 안녕! 안녕하세요?”


보림 출판사의 <달님 안녕!>은 푸른 밤하늘과 노란 달 그리고 고양이와 집과 엄마와 아이의 검은 실루엣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마치 그림자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구조를 갖추고 있어 이야기 전개에 따른 긴장과 이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물론 책을 읽어주는 사람의 실감나는 표정과 목소리 연기가 뒷받침 되어야 그 감정의 흐름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아들에게 <달님 안녕!>을 읽어 줄 때는 목소리 연기하듯 열심히 읽어야 한다.


추석이나 정월 대보름날, 달님을 외경의 눈으로 보고 싶지 않다면 아이와 함께 <달사람>과 <달님 안녕!>을 읽고 친구를 만나는 마음으로 달맞이를 나서도 좋을 일이다. 마당 끝이나 골목길이나, 아니면 베란다 창문을 열고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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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의 거미줄>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내 아이는 나의 거울이다. 내가 바로 해야 내 아이도 바로 할 수 있다. 내가 웃어야 아이도 웃는다. 아이가 감동 깊게 책을 읽게 하고 싶다면 내가 책을 읽고 감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샬롯의 거미줄>을 읽게 하고 싶다면 내가 샬롯의 거미줄을 재미있게 읽으면 된다.

애들 책을 어른이 읽어서 뭐 감동스럽겠냐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천만의 말씀. 어덜 땐 아이들이 이걸 이해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깊은 이야기가 나온다. 때론 어른인 나를 깨우치는 내용이 나오고 때론 나를 울게 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너무 아름다운 표현이 나와서 메모를 하게도 하고 작가들의 삶의 철학이 베어나는 깊이를 느끼게 하는 책들도 있다. 아이들 책을 부모가 같이 읽는 것은 절대 시간낭비가 아니다. 민사고를 어떻게 보내냐는 둥 과고를 보내려면 초등학교시절부터 어떻게 학습시켜야 한다는 둥의 내용의 책을 불을 켜고 볼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읽다 말은 동화를 같이 읽고 엄마가 읽어 봤더니 정말 재밌더라는 동류의식을 느끼게 하는 말 한마디가 아이를 진정한 독서의 길로 가게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아이와 함께 부모의 마음도 크는 것이리라.

-윌버는 이 끔찍한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


<샬롯의 거미줄>의 한 부분이다. 끔찍한 외로움. 작가는 윌버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과연 아이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아이들도 가끔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이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심심함이나 지루하다는 감정의 적극적인 표현일 수 있다. 반면 어른이 느끼는 외로움은 상실이나 허무함을 동반한 괴로움일 수 있다. 아이와 부모가 서로 이해 할 수 없는 감정을 한번 섞어 본다면 혹시 윌버가 느끼는 외로움을 제대로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감저의 교류를 통해 부모는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는 부모를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런 마음으로 샬롯의 다음 대화를 읽으면 윌버와 샬롯의 만남이 얼마나 극적이고 진실한 것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극적’ 요소와 ‘진실’의 만남으로 <샬롯! 의 거미줄>은 정교하게 짜여있다.


-친구를 원하니, 윌버? 내가 내 친구가 되어 줄게.-

윌버와 샬롯은 그렇게 만났다.


샬롯은 그렇게 윌버에게 다가갔다. 아무 조건도 없이 한 영혼이 한 영혼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래서 샬롯은  윌버를 위해 엄청난 일을 벌이게 된다.  신비로운 우정의 힘!


-윌버는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나는 근사하지 않아, 샬롯. 난 그냥 보통 돼지야.”

샬롯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나한테는 네가 근사한 돼지야. 바로 그게 중요한 거야. 너는 나의 가장 친한 벗이고, 나한테는 네가 놀라워.”


-윌버는 우정이 세상에서 가장 가슴 뿌듯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맞다. 나이 들수록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친구라 하지 않던가. 나이가 들고 외로움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윌버의 마음에 동감을 표할 것이다. 오늘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말해보는 거다.

“윌버가 그러는데, 세상에서 가장 가슴 뿌듯한 것이 우정이래....”


<샬롯의 거미줄>의 작가는 아마도 거미를 오래 관찰한 사람일 것이다. 거미의 몸놀림을 표현하는 부분이 그렇고 거미의 부화를 얘기하는 부분이 그런 오랜 관찰을 느끼게 한다.


-윌버는 겨울이 끝나고 새끼 거미들이 나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무언가 일어나거나 부화되기를 기다릴 때에, 삶은 언제나 풍요롭고 차분한 시간이 된다.


-새끼 거미들은 따뜻한 상승기류를 느꼈다. 그 거미는 거꾸로 서서, 방적돌기를 공중으로 향하게 하더니, 고운 비단실을 구름처럼 뽑아 냈다. 그 비단실은 풍선이 되었다. 윌버가 지켜보는 가운데, 새끼 거미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거미들의 부화를 따뜻한 가슴으로 바라보며 숨죽이고 앉아있을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샬롯의 거미줄>에서 흥미로운 것은 샬롯이 윌버에게 간단명료하게 단어의 뜻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다. 아마 샬롯은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언어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필생의 역작’ 이니 ‘가엾은 대물림’ 이니 ‘다재다능하다’ 와 같은 말을 넣어 짧은 글짓기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아니면 아예 사전찾기 놀이를 해도 되고. 아직 우리 아이들은 한글도 못 뗀 처지라 사전찾기나 짦은 글짓기를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움이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커서 <샬롯의 거미줄>을 읽게 되면 짧은 글짓기와 사전에서 단어 찾기 놀이를 꼭 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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