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기행
2012년 1월 17일 오전 6시 50분.
드디어 우리 아이들이 비행기를 타본다. 얼마나 기대되고 흥분되는 일일까?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본다는 것이.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어른들이 갖듯, 우리 아이들은 비행기를 타는 여행에 대한 감탄과 동경의 마음을 키웠다. 그리고 열두 살, 자신이 바라만 보던 자리에 자신이 있는 순간을 충분히 기뻐할 수 있는 나이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떠난다. 아! 벅찬 감정.
첫 비행기와 막 비행기에만 제공되는 할인권의 혜택으로 갑자기 정해진 2박 3일의 여정. 동짓달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야하고 밤 열두 시가 다 되어 집에 오는 일정에 혹시나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날씨가 추운 새벽 공기에 감기가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른들만의 생각이다. 아이들은 첫 비행기를 타야 하므로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순서가 정해진 일일 뿐이다. 아이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움직여 제주도가 그려진 B4용지 크기의 관광지도에서 본 제주로 떠나는 과정일 뿐, 거기엔 ‘감기’ 같은 단어는 끼어들 여지가 없는 일이다.
17일 아침. 우린 공항로비에서 아침을 먹었다. 잡곡밥에 들기름과 소금으로 양념한 주먹밥. 집에서 먹는 끼니가 아닐 때는 늘 주먹밥을 먹어왔던 터라 아이들이나 나에겐 너무도 평범한 한 끼니다. 기내에서 먹을 충분한 간식이 가방에 들어있는 것으로 간소한 아침을 위로했다.
드디어 비행기 탑승, 그리고 이륙. 아이들은 기내에서 제공되는 음료를 좋아했다. 딸은 오렌지를 두 잔 마셨고 아들은 토마토를 두 잔 마셨다. 스튜어디스의 시중을 받으며 아이들은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에 대해 간접체험을 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조종사라는 직업에 대해도 생각해 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륙 직전의 긴장감과 고도를 유지할 때의 안락함과 착륙시의 안도감과 비행기에서 내려 새로운 땅에 발을 딛는 신선함과 설렘을 고루 맛보았을 것이다. 그런 이름의 감정들은 고스란히 내게도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엄숙한 감정이 더 있었는데, 그 감정의 이름은 ‘감사’였다. 그 감사의 근간은 열심히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온 나에 대한 칭찬이었으며, 마음의 기도처가 되어준 부처님께 향한 낮은 귀의였으며, 다가와 준 세월 자체에 대한 감동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벼운 감정의 행복도 느껴졌다. 엄숙하고 무거운 감사의 감정 옆에 발랄하고 가벼운 행복의 감정. 그렇게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2박 3일의 제주 여행은 시작되었다.
제주도행을 결정하고서 거의 보름 가까이를 제주에 관한 책만 보며 계획을 세웠다. 배낭 메고 걸어서 갈 수 없는 제주도. 그래서 우리나라 어느 곳 보다 이동경비가 많이 드는 곳. 그렇기 때문에 한 번의 여행에서 제주도를 모두 보여줘야 한다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아~~ 제주도!
한 번의 제주여행에서 제주도의 핵심을 콕콕 찍어 보여주겠다고 제주도 여행지도를 보고 또 보고 하는 내 모습이 수학의 핵심을 콕콕 찍어주고 싶어 안달하는 학습파 엄마의 열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그런 야심찬 마음으로 여행서를 읽었다. 수첩에 가보고 싶은 곳을 적고, 그 곳을 소개한 여행서 페이지를 적고, 그 순위를 매기고, 가능한 동선으로 조합하고.... 때론 아이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의견도 묻고, 그러면서 여행에 대한 기대로 들뜬 기분도 느껴보고....
인터넷에서 검색하는 정보보단 책을 통해 얻는 정보를 더 신뢰하는 개인적 취향으로 인해 두 권의 여행서와 한 장의 제주관광지도를 보고 또 보며 일정을 짰다. 그리고 제주 현지 안내소에 전화를 해서 정보를 얻었다. 마라도 여객선 운항시간처럼 전화문의가 효율적이지 못한 것들은 인터넷 정보를 참조했다. 그러나 여객선 운항표 안내 끝엔 현지 사정에 따라 운항이 중지 될 수 있으므로 출발 전 전화로 확인하라는 안내문을 보고, 역시 전화가 최고야 하고 혼자 끄덕였다.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제주도 여객정보는 전화안내가 필수인 셈이다. 한라산 등반도 마찬가지로 출발 전 입산통제 여부를 꼭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불확실성이 오히려 마라도 방문이나 한라산 등반에 대한 설렘을 극대화 시키는 세련된 장치 같기도 하다. 파도를 일렁이는 바람, 산길을 숨기는 태연한 눈발, 감쪽같이 시야를 막아서는 안개. 자연을 얕보면 안 된다는 준엄한 교훈이 있어 제주는 더 매력 있다. 그 준엄한 매력을 열두 살의 우리 아이들이 체감할 수 있을까?
고민고민 끝에 제주에서 꼭 해야 할 세 가지를 뽑았다.
첫째, 마라도 탐방.
둘째, 한라산 등반.
셋째, 대초원에서의 승마.
그러나 고백하건데, 내가 보름을 여행서와 관광지도를 펴놓고 보낸 것은 일종의 아이들에게 ‘여행준비는 이렇게 하는 거야’ 라고 가르쳐주기 위한 일종의 ‘시연’이었다. 제주도를 꿈꾸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내 맘속엔 계시처럼 새겨져있었다. 제주에 가면 마라도는 꼭 가봐야지, 한라산도 꼭 올라가 봐야지. 그리고 말을 타봐야지. 좀 정확히는 말을 태워줘 봐야지.
제주 첫 날
계획은 그랬다.
제주 공항에서 버스 터미널까지 가서 서부일주 버스를 타고 하귀를 지나 애월읍에서 하차. 한담 바닷가까지 15분 걸어 간 후, 한담에서 곽지까지 이어진 해안가 길을 걸어서 곽지까지 가고 , 곽지서 모슬포항 가는 서부일주 버스를 타고 이동. 열두 시에 배를 타고 마라도에 간다. 마라도서 자장면 먹고 두 시 반에 다시 모슬포 항으로 이동. 항구서 가까운 송악산에 오른다. 전망 한 번 휘 보고 하산. 용머리 해안과 해안 주상절리를 보고 도순다원에 들렀다가 서귀포로 이동. 정방폭포를 보고 동부일주 막차를 타고 함덕에 하차하여 숙소인 대명리조트까지 걸어간다.
지금 생각하니 줄줄 읽기에도 숨이 찬 계획이다. 웃음이 다 난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하고 싶었고, 빨리 걷고, 시간 맞춰 버스만 착착 와준다면 가능할 것 같아서 세운 계획이었다. 자판 두드리기를 잠시 멈추고 또 한 번 웃는다. 그리고 나를 위로한다. ‘그냥 그 모든 것들을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이야. 허물없는 욕심일 뿐이야. 못 다한 일들은 아이들이 커서 스스로 해낼 거야. 첫 제주 여행을 떠올리며 스스로 해낼 거야... 황당하리만치 엄청났던 계획을 세우던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겠지...’
실제는 이랬다.
제주 공항에서 37번 하귀행 버스를 타고 아홉 시 15분 하귀마을 하차. ‘어디로 가야 바다가 보이나요?’ 물어가며, 속으로 황당해하며, 걸어서 바다가 보이는 하귀 옛길 도착. 한 시간 15분 걸어 구엄마을 도착. 구엄서 택시 타고 애월 도착. 버스를 탈 계획이었으나 버스로 이동해서는 열두 시 배를 타기 어렵다고 판단. 열한 시에 택시 타고 모슬포로 이동. 열한 시 36분, 열두 시 출항하는 마라도행 여객선에 승선. 마라도 자장면 먹고 산책. 산책 중 딸 학교 친구 가족을 우연히 만나 기쁨이 두 배, 두 시 배로 모슬포로 돌아옴. 애월한담 애기바당 산책에 대한 미련 남아 세 시 반에 다시 곽지행 버스 승차. 애월읍사무소 하차. 그토록 소망하던 어여쁜 바다를 찾아 걷다가 걷다가 다시 키친애월까지 택시로 이동. 애월 애기바당서 노닐다 어두워져 택시로 함덕 대명리조트 도착!
계획과는 너무나 다르게 진행된 하루였다. 도저히 불가능한, 너무도 엄청난 계획을 세웠다는 걸 실행하지 못했기에 절감했다. 그러나 열심히 걸었었고 최선을 다해 이루려 했기에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하루였다. 일상이 이렇게 어그러졌다면 참 속상한 하루였겠지만, 꿈같이 짜 논 여행일정이었기에 어그러짐 자체가 깊은 추억이 되었다.
말하자면 공항에서 제주시외버스터미널행 버스를 기다리던 내 눈에 ‘하귀’행 일반버스가 띈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러니까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가려던 내 행선지 일부에 ‘하귀’라는 마을이 있다는 게 생각났고, 굳이 시외버스 터미널을 경유하여 ‘하귀’까지 움직일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하귀행 시내버스를 탔고, 덕분에 우린 서울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제주 시내를 40여 분 여행한 것이다. 평범한 마을과 평범한 버스정류소들을 지나며 평범한 차림의 사람들과 함께 버스 안에서 보낸 40분. 내심 조바심이 났지만 그래도 심지 굳게 바다가 보일 때 까지 앉아있으려는 참인데, 결국 버스 기사님이 어디를 가냐고 묻는다. 하귀리 바닷가라고 대답하자 여기가 ‘하귀’라며 내리란다. 아마도 종점 없이 회차 하는 버스였는지 모른다. 어쨌든 당혹스런 기분으로 내려서 행인에게 물었다. 바닷가를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가르쳐주는 방향으로 한참을 걸었다. 관광지도엔 하귀에서 곽지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가 있었다. 그 길을 찾아 걸어서 곽지까지 가려는 속셈이다. 중간에 그림같이 어여쁜 애월의 애기바당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바다로 이어진다는 길을 더듬어 걸었다. 걷다가 의심스러워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아주머니께 다시 길을 물었다. 다행히 우리가 걷는 길을 쭉 따라 가면 바다가 나온다고 한다. 묻는 길에 애월까진 얼마나 걸릴까 물었다. 바닷가 길을 쭉 따라 가면 애월까지 갈 수는 있는데, 못 걸어 갈 거라며, 걸어서 갈 거냐고 되물으신다. 그렇다고, 지도에는 곽지까지 길이 이어져 있더라며, 곽지까지 걸어갈 거라고 여행자의 호기로움을 담아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그리로 가면 바닷가 길이 있긴 있다고 하시며 들어갔다. 길이 있으면 우린 걷는다! 그런 맘으로 얼마를 더 가니 정말 바닷가 길이 나왔다. 제방 길을 따라가며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해안도로. 그런데 우리가 들어선 그 길은 영화로운 시절을 한꺼풀 보낸 한적한 뒤안길 같았다. 한 때 북적였을 모텔과 카페 건물이 빈 채 음습하게 남아 있는 영락의 뒤안길. 한낮이었지만, 저 건물에서 웬 건장한 남자가 걸어 나온다면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까를 잠시 고민하게 한 폐허를 빠르게 지나 다시 텅 빈 제방으로 올라섰다. 바람만이 우리와 함께 걸었다. 우리가 걷는 반대편 길의 노견을 따라 줄 맞추듯 늘어서있는 밭두렁 돌들만이 우리를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 같았다. 걷다보니 더워져서 아이들은 잠바를 벗었다. 언제까지 걸을 거냐는 아이들을 초콜릿과 밤으로 달래며 걸었다. 심심하니까 아이들은 여행가방 둘을 내게 넘기고 달렸다. 달리다 멈춰 기다리다, 이번엔 여행 가방을 다시 받아들더니 한손으로 끌며 달린다. 사람이 도로를 차지하고 걷는 건 부당하다고 시위하듯 가끔씩 달려오는 자동차는 우릴 노견으로 몰아냈다. 그렇게 가끔 흰 줄 밖으로 밀려나긴 했지만 우린 자유롭고 행복했다. 그러나 한 시간 넘게 걷고 걸었으나 우리는 여행서에서 본 애월 한담의 어여쁜 바닷가에 닿지 못했다. 결국 택시를 불러놓고 구엄리 바닷가를 천천히 걸었다. 이제 택시가 오면 더 걷지 않아도 된다는 위안이 생겼다. 그런데 그 위안이 주는 기쁨보다 훨씬 신나는 일을 아이들이 발견했다. 바위 탐험.
뭐라 해야 할까? 한 덩이의 검은 산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각조각 이어 붙인 시커먼 바위덩이의 합체도 아닌, 칠흑 같은 어둠을 한 삽 푹! 하고 떠다 널찍하게 부려 논듯 한 형체. 바람은 휙휙 어깨를 떼밀고, 파도소리는 먼 데서 울려오는 싸움터의 함성처럼 웅장한데. 아이들은 겁도 없이 그 검은 형체 속으로 뛰어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바다와 제방사이에 넓게 펼쳐진 검은 벌판은 제방 위에 있는 나의 입장에선 절벽이 아니라 그저 심한 개성을 지닌 평지다. 그래서 ‘엄마, 저기 좀 가 봐도 돼요?’ 하고 묻는 아들에게 택시가 올 때 까지 잠깐만 갔다 오라고 허락을 했다. 그 시커먼 바위벌판으로 아들이 뛰어들고 그 뒤를 딸이 뛰어들고...그렇게 그 검은 벌판에 내 아이들이 발을 딛는 순간부턴 그곳이 절벽의 정수리라는 깨달음과 함께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아찔한, 발목이 시린 절벽의 정수리를 내 아이들이 걷고 있다! 깊고 좁은 협곡. 발부리를 걸고넘어질 것처럼 불쑥불쑥 솟아난 장애물도 있는 거대한 지형지물의 한 끝은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인 것을. 수직인 것을.....
가 봐도 된다고 불식간에 허락해놓고 나는 애간장이 녹는다. “조심해!”, “이제 그만 돌아와!”, “넘어지면 큰일 나. 얼른 와!” 하고 소리치며 마음을 조였다. 그러나 찌직거리는 마이크 소리마냥 귓전에 마찰음을 내며 부는 바람은 아이들을 부르는 내 목소리를 무력하게하며 반대방향으로 실어 보냈다. 억센 바다바람이 아이들을 확 밀어 넘어뜨릴 것도 같았고, 아차 하고 이미 내딛은 발이 허공을 수직으로 가르며 떨어질 것도 같아 몹시도 두려웠다. 눈에 보이는 위험 앞에 자식을 보낸 어미의 격정적 두려움. 잠시 동안 느낀 그 격정적 두려움이 구엄리 바다에 대한 경외심이 되어 일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위험하니 돌아오라는 말은 안 들렸는지 아랑곳 않더니, “택시 왔다 얼른 와!” 하는 말엔 곧 걸음을 돌려 나온다. 엄마는 기다리게 할 수 있지만, 택시 아저씨를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아이들의 도덕률. 기다리는 엄마가 된 걸 후회하지 않고, 남을 기다리게 하지 않는 아이들로 큰 걸 속으로 기뻐했다.
우린 택시로 애월 버스정류장엘 갔다. 그러나 결국 배 출항시간에 맞추려고 거기서 다시 택시를 타고 모슬포항엘 갔다. 열두 시 출항하는 배를 타고 갔다가 두 시 30분 배를 타고 떠나온 마라도.
마라도!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
허기진 조국애를 일깨우는 이름 마라도.
좋아하는 자장면을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을 마라도.
자장면 집에 여행 가방을 맡겨두고 일주도로를 산책하고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산책로에서 우연히 딸 친구 가족을 만나 ‘우연히’란 여행의 매력을 한껏 느꼈다. 여행서에서 본 절이며 마라분교며, 즐비한 조개구이 집을 지나며 난 줄곧 ‘국토의 최남단’이란 화두에 심취했다. ‘이 땅을 대한민국이라 부르기 위하여 독립 운동가들은 목숨을 바쳐 투쟁했구나!’,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어 대한민국의 최남단이란 감개무량한 이름의 섬에 설 수 있구나!’ ‘그리고 오늘 미래 대한민국을 이끌 우리 아이들이 이 땅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어린 너희들이 이 벅찬 느낌을 알랴마는, 엄숙하고도 도도한 역사의 물길은 공기처럼 부드럽게 너희를 감싸고 흐를 것이니, 언젠가 느끼게 되리라. 생의 영광된 순간에......’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라도를 보고 나오는 길에 이번에는 거꾸로 곽지해수욕장에서 애월까지 걸어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게 바로 미련의 힘이리라. 아쉬움. 그래서 다시금 계획을 수정하고 숙소로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설득해 세시 반에 곽지행 버스를 탔다. 그런데 음력으로 동짓달, 해가 예상보다 일찍 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해는 중천에 있었지만, 뭔가 한풀 꺾인 햇빛이었다. 그래서 곽지부터 애월까지 산책로로 걷기는 포기하고 책에서 본 애월의 애기바당만 보기로 다시 계획을 수정했다. 아무래도 애월 읍사무소가 애월의 중심이 아닐까 추축하고 애월 읍사무소에 하차했다. 버스에서 내려섰을 때의 느낌. 아뿔싸! 새로 지은 읍사무소만 덩그라니 있는 휑한 버스정류장. 산촌에 가서 산으로 가는 길을 묻는 것만큼이나 황망한 질문이지만, 읍사무소 건너편에 있는 다소곳한 건물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바닷가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확신은 없지만 들은 대로 길을 잡아 한참을 걸었다. 인적도 인가도 없이 공공건물 몇 채 낯설게 서 있는 길을 한참 걸어가자 마을이 나왔다. 그리고 그 마을길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있었다. 방파제와 둑으로 격리된 일렁이는 바다.
이런 바다가 아닌데... 날은 저물어가고...애들은 힘들다고 칭얼대고... 과연 오늘 애기바당을 보기나 보게 될까...
이럴 땐 택시를 타야했다. 마음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등불을 켜야했다. 내가 어두워지면 애들은 칭얼댈 대상을 잃게 된다. 내가 아이들의 빛이다. 택시라도 타고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마침 운 좋게 택시를 발견했다. 택시를 불러야 오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택시를 만나는 건 발견이라 표현해야 맞다. 택시 기사님께 ‘키친 애월’이란 카페를 가자고 했다. 그 예쁜 바다는 ‘키친 애월’의 코앞에 있다고 여행서에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오래 걸리지 않아 우린 ‘키친 애월‘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님께 바다를 보고 올 시간에 맞춰 다시 와달라고 예약을 해 놓고 바다로 향하는 산책로에 들어섰다.
“얘들아, 바로 여기야! 책에 사진 나온 곳이 바로 여기야. 저기 저 집 좀 봐. 사진에 나온 집이야.”
드디어 제주 공항에 내릴 때부터 찾아 다녔던 ‘그 바닷가’에 온 것이다. 비록 해안가 산책로를 걸어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마라도 다음으로 꼭 보려했던 바다를 보게 된 것이다. 어려운 숙제 하나를 끝낸 것 같은 성취감에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성취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을 애기바당을 통해 얻었다.
너무나 맑은 물, 깨끗한 고운 모래. 얕은 바다는 투명하고 말갛게 찰싹였고, 좀 멀리 떨어진 바다는 에메랄드 빛으로 고여 있었다. 애기들 놀라고 아빠들이 바다 한 귀퉁이에 바위를 옮겨 에둘러 놓은 듯 얕고 둥그렇게 생긴 바다 웅덩이. 그 웅덩이에 조심조심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애기들이 놀아도 안전한 생김새라서 ‘애기바당’일까, 너른 바다가 아니라 바위섬으로 들어 싸인 작은 바다라서 ‘애기바당’일까.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떨까. 이렇게 어여쁘면 되었지. 사연이야 아무래도 좋아라. 이렇게 행복하면 되었지.
찰박찰박 걸어 다녀도 좋을 만큼 잔잔하고 깨끗한 바다. 그런 ‘애기바당’을 본 감동으로 아이들과 나는 행복했다. 많이 행복했다. 딸은 1월의 바닷물에 맨발을 담궜고, 아들은 바다를 둘러싼 바위에 기어올랐고, 나는 시야에서 아이들을 놓치지 않을 거리까지 산책을 했다. ‘너무 멋져, 너무 예뻐, 너무 좋아, 너무 깨끗해, 너무 멋있어. 오길 너무 잘했어. 와! 너무 좋다. 그치?’
너무나도 좋은 애기바당. 고 작은 웅덩이를 둘러싼 고양이 바위며 악어바위를 맘껏 오르내리며, 바위 꼭대기에 걸터앉아 한 없이 바다를 바라 볼 시간을 아이들에게 주었으면 좋으련만... 해는 저물어 가고 아무리 애기바당이라 해도 바다는 바다인지라, 예측할 수 없는 파도가 밀려올까 겁나기도 했다. 행여 바위에서 발을 헛디디면 바로 출렁이는 바다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내내 불안불안하고, 조마조마하여 맘껏 놀라는 자유를 줄 수가 없었다. 바다에 뛰어들어 아들을 구해올 용기도 재주도 없는 나로서는 오로지 단속하는 일이 최선일 뿐이었다. ‘발 디딜 곳에서 눈을 떼면 안 된다. 다음 발이 땅에 닿을 때 까진 뭐든 끝까지 잡고 내려와야 한다. 끝까지 차분해야 한다....’
끝없는 주의사항을 들으며 아이들은 바위를 오르내린다. 재미와 성취감. 아름다움에의 도취. 사그러지는 햇살이 아니었다면, 기다리고 계실 택시 기사님이 아니었다면 우린 그 바다를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제주에 오면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 서열 1위에 애기바당을 자리매기며 숙소로 향했다. 마라도와 애기바당으로 충분히 행복한 하루였다.
제주 이틀 째
계획은 이랬다.
터미널에서 1100도로를 가는 버스 타고 어리목 매표소 앞 하차. 한라산 등반 후 영실 쪽으로 하산. 4시 36분 버스타고 제주시외버스터미널 도착. 동부일주 버스로 숙소로.
워낙 계획이 단촐 했기에 크게 어그러지지 않았다. 어리목으로 올랐다 영실로 하산하려는 계획이 영실로 올랐다 어리목으로 하산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려는 계획이 택시를 타고 이동하게 되었다는 것 말고는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넘치는 하루였다. 아이들도 준비물도 한라산도 완벽했다. 무사히 돌아옴이 완벽의 최종답안이 되었다.
함덕에서 영실까지 택시비가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함덕에서 어리목까지는 더 비쌌기 때문에 시작을 영실로 바꿨을 뿐이다. 더구나 출발이 늦은 걸 감안한다면 영실이 유리했다. 영실은 매표소에서 산장까지 탐방로로 차가 갈 수 있었고 그러면 한 시간 정도를 벌 수 있었다. 더구나 택시기사님은 택시 요금은 깎아주지 않는 대신 산장 입구까지 태워주겠다고 하셨으므로 잘 되었다 싶었다. 택시 기사님은 영실로 가는 길에 ‘신비의 도로’에 잠깐 들러 주셨다. 일명 ‘도깨비 도로’라고도 하는데, 오르막에서 시동을 끄고 있는데도 차는 저절로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이미 ‘착시현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는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너무 신기해했다. 아쉬움과 호기심을 안고 영실매표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매표소 지나 탐방로 끝까지 태워다 주시겠다던 기사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월동 장비를 갖춘 차만 진입을 허용했는데, 우리가 타고 있는 택시엔 월동장비가 없다고 하셨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니 월동장비가 없다는 해명은 안하셨던 듯하다, 그냥 더 이상 못 간다고 했을 뿐. 매표소부터 산장까지 이어진 지루한 탐방로를 걷는 한 시간 반 동안 나는 속이 상했다. 이렇게 먼 줄 알았다면 택시비를 덜 드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그렇게 내내 속상해 할 만큼 아이들은 팍팍한 아스팔트길에 짜증을 냈다. 언제쯤이면 흙을 밟고 가는 오밀조밀 재밌는 등산로가 나올까. 다리 아프고 지루하다고 왜 한라산은 꼭 가야하냐고 불만을 얘기하는 아이들을 달래가며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걷기를 한 시간 반. 드디어 본격적인 등산로 입구에 다다랐다.
그 한 시간 반을 걷는 동안 싸락눈이 오다 그치고, 비는 오는 둥 마는 둥 뿌리다 말고 하였다. 변화무쌍. 큰 산은 원래 고도에 따라 날씨와 기온의 변화가 무쌍함을 알기에 준비를 단단히 한 터라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아이들 마음에 지루함이 가득하여 그것이 장애일 뿐이었다. 오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왜 올라야 하느냐는 마음이니 걸음이 즐겁지 않은 것이다. 산을 오르기 전엔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이다. 왜 산에 올라야 하는지. 다만 내려오고 나면 왜 올랐어야 하는 지 저절로 알리라 믿고 독려할 뿐이다.
우비를 입히고 가방을 비닐봉지로 씌우고 하며 ‘높은 산은 원래 이래. 그러니까 큰 산에 갈 땐 꼭 우비를 챙겨야 하는 거야.’ 득의양양 잘난 체 좀 하며 걸었다. 날씨는 궂었지만 기온은 크게 내려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배고프다고 찡찡대는 아이들에게 등산로에 들어서면 점심을 먹자고 한 터였다. 그래서 본격적인 등산로에 들어서자 바로 점심 먹을 곳을 찾았다. 그런데 탐방로와는 달리 등산로는 온통 눈이었다. 어디에 서도 눈 위가 아니면 발 디딜 곳이 없이 눈밭이었다. 눈이 쌓이지 못하는 수직으로 곧게 자란 나무기둥을 빼고는 다 흰 눈이다. 조금이라도 수직과 벗어난 물체가 있으면 그 위엔 눈이 쌓여 있었다. 우리가 준비하는 컵자장과 컵짬뽕 냄새를 맡았는지 까마귀 몇 마리가 날아들었다. 앞으로 어떤 오르막을 올라야 할지, 얼마만큼 더 걸어야 할지는 아이들 생각에서 없어졌다. 그저 점심을 먹고는 투덜대지 않고 가기로 약속을 했으니만큼 아이들은 열심히 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다 먹은 시간이 한 시. 그냥 있어도 배고플 시간인데 줄곧 걸었으니 허기가 올만도 했다. 유난히 배고픔을 못 참는 체질인 아들에겐 힘든 시간이었겠다 싶어 늦은 점심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뜨끈한 컵자장과 컵짬뽕 한 그릇에 속도 달래지고 마음도 달래지는 아이들의 단순함에 정이 솟았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 용기의 원천이 되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뻐근하리만치 사랑스러움이 솟구쳤다. 그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한라산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어디서 출발해 어디까지 갔다 오는 길인 줄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우리가 오르려는 길을 미리 밟고 내려온 사람들이 길에서 한 발짝 비켜선 거리에서 선 채로 컵라면을 먹고 있는 우리를 보고는 인사삼아 한마디 건낸다. 여기서 벌써 먹으면 어쩌냐고. 올라야 할 길이 먼데 등산로 초입서 먹기만 먹고 있음 어쩌냐는 우스갯소리고, 또한 산을 내려온 여유 있는 마음에서 오는 염려임을 안다. 그런 대답 없어도 되는 인사가 산길에선 힘이다. 그런 염려의 인사 덕분인지 점심을 먹고 나자 아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투덜대지도 않고, 뒤처지지도 않았다. 컵자장 한 그릇에 저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아들 뒷모습을 보는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퍼진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영실에서 어리목으로 넘어가는 코스는 백록담을 볼 수 없다는 큰 아쉬움이 남는 길이다. 그러나 갓 열두 살이 된 아이 둘을 데리고 겨울이 한창인 1월 중순에 한라산 백록담을 넘보려는 계획은 신령스런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님을 알기에, 아쉽지만 정상을 빗겨 윗세오름까지 올랐다 바로 어리목으로 하산하는 길을 택했다. 그런데 매표소에서부터 산장까지의 그 지루한 탐방로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윗세오름을 향하는 등산로는 울퉁불퉁한 오르막길이었다. 해서 올라가는 우리보다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더 힘들어했다. 길이 좁아 마주치는 데서는 어느 한쪽이 비켜서 주어야 했다. 그렇게 비켜서고 지나가고 하며 자연스레 서로를 쳐다보게 되는데, 내려오는 사람들이 우리 차림을 보고는 걱정해서 한마디씩 한다. 미끄러워요, 아이젠 없인 위험해요. 장년의 아들을 붙들고 내려오는 아주머니 한 분은 아예 우리보고 다시 내려가라고 까지 하신다. 그 충고가 감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충고를 받아들일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좀 더 조심해야 겠다고 속으로 생각할 뿐.
등산로 초입에서 아이젠이 없으면 못 올라간다고 안내하는 분이 계셨는데, 아이젠이 없으면 등산로 출입을 통제하느냐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기에 그냥 올라온 참이다. 아이젠 가격이 너무 비싸서 살 엄두가 안났다. 그래서 발 끝에 힘을 주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한 발 한 발 걸으면 웬만한 눈길도 올라 갈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조심조심 올라갈 참이다. 적지 않은 등산 경험과 우리 아이들의 걷는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어떤 안전용품보다 조심하는 마음이 가장 큰 안전용구라 믿으며 자신을 독려했다. 또 어떤 아저씨는 아빠가 뒤에 오느냐고 물었다. 엄마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엔 무리라는 걱정이리라. 산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스치며 주고받는 인사는 진실임을 알기에 아빠는 안온다고, 가다가 미끄러우면 다시 돌아오마고 인사하고는 계속 나아갔다. 산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의 도전의식이 조화롭게 만날 때 아름다운 등반이 됨을 믿고 아이들을 독려했다.
다람쥐, 빠릿빠릿한 다람쥐처럼 그러나 돌다리를 밟는 신중함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올라가자 사람들은 우리보고 다시 내려가라고 걱정하지 않았다. 수고하시라고 격려할 뿐이었다. 다시 내려가는 게 방법이 아니라 어서 올라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게 더 나은 방법일 때 사람들은 그렇게 인사를 건넨다. ‘수고하세요!’
그런데 울퉁불퉁하고 오가는 사람이 만나면 비켜서야하는 너비의 등산로에 ‘썰매금지’ 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울퉁불퉁하고 경사지고 꼬불거리는 길에서 썰매를 타겠어.’ 참 이해할 수 없는 현수막이었다. 그렇게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가파른 오르막이 끝나고 드넓은 평지로 나오자 바람이 우리를 주춤거리게 했다. 얼마나 앞에서 시작된 바람인지, 얼마나 멀리까지 달려갈 것인지, 그저 내 몸의 모든 것을 펄럭여놓고, 바람에 밀려 발이라도 헛디디면 어쩌지 하는 순간적인 두려움에 맥박까지 펄럭이게 해놓고 바람은 지나가고 또 새로운 바람이 다가와 모든 것을 끊임없이 펄럭이게 했다. 그렇게 사나운 바람을 뚫고 오르는 동안은 길을 따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바람을 맞받아치며 발을 떼어 놓으면 거기가 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자 바람이 불지 않았다. 말하자면 바람의 언덕을 통과한 셈이다. 대신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감춰버렸다. 넓은 평지가 펼쳐졌고 길이 넓어진 만큼 발자국도 넓게 흩어져 있었다. 바람을 되받아치며 걸을 땐 억세게 움직여야 했다. 바람만큼 억세게. 그러나 안개 속에선 고요를 읽어야 했다. 안개가 가린 길을 고요한 호흡으로 더듬어야 했다. 안개보다 고요히 발을 내딛어야 안개가 비켜서고 길이 보였다. 장대 끝에 매달린 붉은 헝겊 조각. 나부끼지 않는 깃발을 달고 장대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 이끌림에는 모종의 비밀이 있는 듯 마주 오는 등산객들을 만나게 해 주지 않았다. 영실에서부터 우리와 같이 어리목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까 하산 할 시간까지를 계산해서 오를 사람은 우리보다 먼저 올랐고 어리목에서 윗세오름을 거쳐 내려오는 사람들의 후미를 이미 만나고 오른 참이라는 상황이 인식되자 겁이 났다. 산에서 닥칠 수 있는 위기상황을 함께 할 동반자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내 안에서 두 가지 감정 반응이 동시에 일어났다. 고립감과 자유로움. 어떻게든 나의 힘으로 아이들과 무사히 하산해야 한다는 두려운 고립감과 앞에도 뒤에도 우리밖에 없다는 막연한 자유로움. 안개 속에서 일어나는 나의 두 감정의 연쇄반응은 결국 두려움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나의 두려움을 눈치 채지 못했고, 부러 아우성치며 자유롭게 외치는 나의 외침을 함께 누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외침은 나에겐 힘이 되었다. 고립이 아닌 함께 하는 길은 곧 맑은 눈꽃을 피워냈다. 억센 바람과 비밀스런 안개지대를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환상적인 눈꽃길! 바람 세찬 경사에선 시큰해지는 발목을 진정시키며 조심하라고 소리를 질렀고, 안개 자욱한 길에선 오직 깃발을 향해 내 숨소리를 들으며 걸었고, 눈꽃 가득한 길에선 노래를 불렀다. 환한 눈꽃길에 서자 비로소 어깨솔기가 찢어져 바람에 펄럭이는 아들의 우비가 눈에 들어왔고, 딸의 우비는 말짱히 매무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있으나마나한 내 우비는 아예 벗어서 가방에 넣었다. 걷다가 힘들면 초콜릿을 먹고, 단 것만 먹을 수 없어 밤도 한 봉씩 들고 먹었다. 그렇게 걸어걸어 드디어 윗세오름 산장에 도착했다. 온통 안개로 가득 차 있어서 산장이 발치에 닿았을 때에야 산장 건물이 보였다. 두 시 반. 점심을 먹고 꼬박 한 시간 반을 걸은 셈이다. 그 한 시간 반 동안 한라산은 우리에게 신령스럽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주었다. 산장에 무사히 도착 한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산장 안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점심을 먹고 남은 보온병의 물은 미지근했다. 그 미지근한 물로 믹스커피를 타 마셨고, 아이들은 호두차를 타 마셨다. 차 한 잔을 마실 시간만큼의 휴식. 내려갈 길이 멀었다. 십사 분 정도의 휴식은 휴식이라기 보단 통과의례에 가까웠다. 생각은 내려갈 길을 염두에 두고 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 길을 나서는 사람들처럼 어리목을 향해 출발했다. 두고 온 산장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었고 곧 보이지 않았다. 우리와 마주보고 오는 사람은 없었다. 뒤에 따르는 사람도 없었다. 어리목으로 내려가는 길은 넓었다. 길이 넓었다기 보단 모든 것이 눈으로 덮혀 있어서 어디가 길인지 모르고 길이 넓다고 느끼고 걸었을 뿐이다. 그러나 내려오는 길에도 몇 미터 간격으로 빨간 깃을 단 장대가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하얀 안개 속에서 가만가만 색깔을 드러내는 깃발이 하나씩 다가설 때마다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산을 내려갈 때 맛보는 그런 안도감은 산을 오를 때의 안도감과는 좀 다른 무엇이 있었다. 흥분. 산을 오를 때는 깃발 하나를 마주칠 때마다 흥분과 안도의 감정이 뒤섞이는 묘한 성취감을 느꼈지만, 내려가는 길에는 깃발 하나를 남겨두고 떠난다는 허전함과 편안함의 감정을 느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나의 감정을 구분지어 단어화 할 수 없었지만, 지금 그때를 돌이켜 생각으로 순간순간을 다시 체험하건데 그렇다는 뜻이다. 엄밀히 말해 체험과 음미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체험은 역동적이되 음미는 수동적이고 체험은 순간적이되 음미는 오래 지속 할 수 있는 것이다. 일 년도 넘은 일을 음미하며 굳이 한라산 등반을 다시 체험하건데 라고 표현함은 그 때의 일이 너무나 생생하여 한 시간 반을 방금 막 오른 듯하고, 방금 내리막을 시작 한 듯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때 알 수 없었던 등산시와 하산시의 묘한 심리적 차이를 느낌은 역시 음미의 영역이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나의 심장은 역동적으로 한라산의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다. 차갑고 촉촉하고 해맑은 한라산의 공기를.
윗세오름에서 내리막을 걷기 시작해서 네 시 이십오 분에 어리목 매표소에 도착하기까지의 한 시간 40여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미끄러운 내리막을 순식간에 내려올 수 있었던 비법은 바로 오르는 길에 보았던 현수막에 있었다. 우린 도저히 미끄러운 길을 걸어서 내려올 수 없었다. 그래서 엉덩이를 눈밭에 붙이고 발로 방향을 조절해가며 미끄러져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썰매를 탔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우린 윗세오름산장에서 어느 정도 내려온 길에서 부턴 걸을 수가 없어서 미끄러져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고 할 뿐이다.
아들이 먼저 우비자락 양쪽을 엉덩이에 붙여 여며 쥐고는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들의 비닐우비는 찢어지기도 잘 찢어지더니 미끄러지기도 잘 미끄러졌다. 딸도 미끄러질 때 우비자락이 위로 밀려올라가지 않도록 꼭 여며 쥐고 펄썩 주저앉아 내려갔다. 그러나 딸의 우비에는 표면에 미세한 요철이 있어서 잘 미끄러지지 않았다. 내 우비는 다 찢어져 이미 가방에 들어가 있는 터였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외투자락을 깔고 앉아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외투 겉감의 재질이 폴리에스터인지라 매끄러웠다. 의외로 속도가 빨랐다. 결국 우비와 겉옷을 썰매삼아 타고 내려오는 길은 재미있고 빨랐다. 내려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싶으면 발 뒤꿈치를 눈길에 박아 브레이크처럼 사용했다. 처음엔 아이들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미끄럼을 탄 것이 나중엔 미끄럼 자체가 재미있어져 버렸다. 겨우내 눈이 내려 쌓이고 다져지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리고 또 다져진 눈길의 미끄럼은 긴장감 넘치는 재미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렇게 주룩주룩 미끄러져 내려오지 않았다면 아마 산에서 밤을 맞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어리목 매표소까지 내려오는 길은 덕분에 아주 재밌었다. 그리고 이제는 집에 간다는 생각에 매표소에서 버스정류장 까지 한 십여 분 걷는 건 일도 아니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남은 주먹밥과 김치로 시장기를 달랬다. 추워서 벌벌 떨면서도 아이들은 주먹밥을 맛있게 먹었다. 다섯 시가 가까워지자 정류장은 어스름에 잠기기 시작했다. 처음 기다릴 땐 산을 걸어내려 온 여운이 있어 몸이 따뜻했지만, 한자리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몸이 식었다. 그리고 많이 지쳐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 기사님은 빈 차로 가느니 합승을 해서 좀 싸게 해드리겠다고 권했지만, 사람들은 그냥 버스를 탄다고 거절했다. 아이들을 쳐다보고 버스 올 시간을 헤아리고 택시비를 생각하고. 머리로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가며 계산을 해보았다. 아이들은 택시를 본 후론 택시를 타자고 조르고 있다. ‘어쩔까. 어쩔까, 좀 있으면 버스가 올 텐데... 애들은 피곤하고 버스는 제주시내에서 숙소까지 가는 버스로 또 갈아타야하고... 버스비와 걸리는 시간. 애들이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그래! 타자! 애들이 안 아픈 게 첫째지.’ 결국 버스 오는 시간이 다 된 시간에 택시를 탔다. 기사님도 우리가 있어 다행인 게다. 아님 빈차로 그 길을 내려가야 할 터인데.
아 ! 따뜻하고 아늑한 택시! 지친 아이들은 택시를 타자마자 코까지 골며 잠에 빠졌다. 택시를 타고 오길 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젖은 바지를 벗어 널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할 동안 나는 밥을 지었다. 따끈한 쌀밥에 살짝 구운 김. 그리고 잘 익은 김치. 우린 저녁까지 내내 행복했다.
그날은 평생을 두고두고 얘기할 추억 하나 한라산 눈밭에 새겨 놓은 하루였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또다시 한라산에 오를 날이 온다면 그 사연 읽을 수 있으리라. 어쩌면 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읽을지도 모르지...
제주 3일 째 --마지막 날의 다급함, 알뜰함, 그리고 돌아옴.
아빠가 왔다.
아빠가 없어서 무서웠던 너럭바위와 아빠가 없어서 걱정됐던 고양이 바위아래의 파도와 아빠가 없어서 못 갔던 도순다원과 아빠가 없어서 힘들었던 캐리어 들고 버스 타기와...
아빠가 와서 위험한 일 미룰 수 있고, 아빠가 차를 빌려와서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제주 마지막 날이다. 최대한 여러 곳을 가야했고 , 최대한 많이 보아야했고, 최대한 맛있는 걸 골라 먹어야 했다.
새벽밥에 가까운 아침을 서둘러 먹고 여덟 시 18분에 숙소에서 나왔다. 가보고 싶은 곳 중에 꼭 가야할 곳을 또 선정했다. 오름의 대표 성산 일출봉, 용암굴의 대표 만장굴, 민속촌서 승마, 내장까지 넣어 끓인다는 성산포 시흥 해녀의집 전복죽 , 그리고 어느 소설가가 극찬했다는 춘자싸롱의 밀면.
일출봉 가는 길에 있는 김녕 미로공원엘 들렀다. 내 입장에선 제주의 명물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주는 보너스로 택한 곳이다. 여태 엄마가 주장 하는 대로 갔으니 아이들 원하는 곳 한군데 가줘야겠다고 생각해서 말하자만 인심을 쓴 것이다. 돌고래 쇼도 유리공예 체험장도 테디베어 박물관도 다 안된다고 일정에서 뺀 터였다. 돌고래 쇼는 돌고래가 불쌍하니 안 되고, 유리공예는 나중에 이탈리아에 가서 체험해 보고, 테디베어 박물관은 적당한 이유도 없이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했다. 게 중에 김녕 미로공원은 좀 끌렸다. 만화영화 ‘아나스타샤’에 측백나무인 듯 생각되는 나무미로가 나오고, 해리포터 ‘불의 잔’에도 나무미로에서 경기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그 비슷한 미로를 직접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미로를 만든 사람에 대한 배경지식도 김녕 미로를 선택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대학 교수로 제주에 왔다가 제주가 좋아 눌러 사는 외국인 교수가 나무를 심고 가꿔 만든 공원. 그러기에 조금 덜 상업적인 냄새가 나서 호감이 갔다.
아이들은 본인들이 가고 싶은 곳을 가는 터라 더 좋아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공원 화장실 주변을 둘러보며 청소를 하는 듯 보이는 외국인이 있었다. 아마도 미로공원의 주인장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화장실엘 갔다가 나는 딸과 아들을 소리쳐 불렀다.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화장실에 있어서였다. 일회용 변기 시트 지급기. 버튼을 누르면 얇은 종이로 된 일회용 변기 시트가 나오는 장치다. 서울 장안 웬만큼 편의시설이 잘 된 곳에서도 보기 힘든 일회용 변기 시트를 보고 김녕미로공원이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공원이란 확신이 들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공공 건물의 화장실 청결상태를 우선 평가 대상으로 치는 나로서는 화장실에 들른 일이 참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처음엔 미로 규모가 생각보다 작아서 얕보았던 내가 미로에 갇혀서 안내원을 불러야 하나 어쩌나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다행히 희망을 잃지 않고 부지런히 돌아다닌 아이들이 먼저 미로를 탈출해 종을 울렸고, 아이들이 위에서 내려다보며 “오른쪽, 거기서 왼쪽으로 돌아서!” 하는 식으로 안내해줘서 겨우 미로를 통과했다. 미로! 분명 다른 길이라고 잡아 갔는데 또다시 제자리고, 기억을 거꾸로 돌려 뒤돌아 나가도 그 시작된 지점이 아닐 때, 나 바보 아니야? 하는 의혹이 저절로 들고 만다. 그러니 쫓기는 자와 쫓는 자 사이의 미로는 얼마나 공포일까. 잡힐지 모르는 자의 절박함과 놓치면 끝장인 자의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미로. 그런 미로를 웃으며 경험 할 수 있어 좋았다.
열 시 50분. 만장굴에 도착했다. 만장굴엔 마라도와 한라산에선 볼 수 없었던 외국인 관광객이 많았다. 만장굴은 그저 길고 넓고 평평했다. 단양 고수동굴의 아기자기하고 꼬불꼬불하고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화려한 생김에 비해 지루하리만치 크기만 하고 길기만 했다. 그 덕에 동굴을 걸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점은 좋았다.
점심은 전복죽이다. 마침 추천 받은 전복집이 다음 목적지인 성산일출봉으로 가는 동선 안에 있었다. 해녀의 집. 이름만 무성한 집이 아니라 죽 속에 전복향이 가득해서 유명세가 무색하지 않은 집이었다. 정말 맛있었다.
전복죽 집에 차를 세우고 ‘조가비 박물관’ 엘 갔다. 전복죽집에서 나온 전복껍데기로 외벽을 장식했나 싶은 생각이 들만큼 전복죽집과 조가비 박물관은 붙어 있었고, 박물관 외벽은 전복껍질로 장식돼 있었다. 작은 규모의 박물관이고 시간이 바쁜 핑계로 관람시간을 30분으로 정해놓고 들어갔다. 들어가서 아주 큰 소라껍질과 아주 작은 소라껍질을 보고 아주 예쁜 조가비와 아주 신기하게 생긴 조가비를 보았다. 그리고 그런 작은 박물관을 갈 때마다 간절히 드는 생각. ‘하리하우스에는 언제나 박물관을 만들게 될까. 개인 박물관을 갖는 다는 건 너무 멋진 일이야.’ 박물관에 대한 내 속의 열정이 시샘으로 바뀌기 전에 박물관을 만들기 까지 이곳 박물관장님은 얼마나 노력했을까 하는 존경의 마음을 추슬러야만 한다. 그 존경의 마음으로 나를 반성하지 않으면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만 다급해져 안타까움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 다급한 시샘을 잊게 해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박물관 기념품 판매소였다. 양식진주 핸드폰걸이와 귀걸이 팔찌 목걸이 같은 꾸미개들이 예뻤다. 그리고 양식이건 천연이건 간에 진주가 얼마나 하는지 전혀 감을 잡아본 일이 없는 내 판단으론 물건들이 싸고 예뻐 보였다. 선물 할 사람을 손으로 꼽으며 하나씩 사다 보니 생각보다 여러 개를 사게 되었다. 색깔만 다르게 해서 팔찌를 샀다. 비행기 타고 가는 첫 여행을 응원해준 분들께 드리는 감사의 인사가 어여쁜 양식진주 팔찌로 풍성해졌다.
대표적 오름인 성산 일출봉 관람을 끝내니 2시 40분.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따라 달려 표선 민속촌에 도착하니 세 시 30분.
민속촌! 박제된 생활공간! 뭔가 있긴 한데 가까이 가보면 별 볼일 없는 전시물에 휑한 느낌이라 번번이 금방 돌아서게 되는 곳. 민속촌서 인상 깊었던 일은 전날 한라산에서 만나 우리를 보고 위험하니 도로 내려가라고 진지하게 말씀해 주시던 아주머니 일행을 다시 만난 것이다. 반갑게 알은체를 하시며 우리가 윗세오름까지 올랐다 어리목으로 내려온 것을 들으시고는 애들이 참 대단하다고 감탄의 인사를 보내셨다.
또 한 가지 아이들이 혹 빠지게 좋았던 일은 승마다. 제주에서 꼭 해야 할 일, 승마를 위해 민속촌에 들른 것인데, 역시 잘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승마! 딸이 먼저 타고 갔다가 웃으며 돌아오는 걸 보더니 아들도 탔다. 처음엔 타지 않겠다고 하던 아들이 한 바퀴 돌고 올 때 지은 표정은 가히 압권이었다. 온 얼굴은 홍조를 띠고 눈은 반짝였다. 입술은 무언가 할 말로 가득 찬 듯 즐겁게 벌어졌다. 말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붙들고 간절히 말한다. ‘내 용돈 털어서 한 번 더 타면 안 돼?’
속된 표현으로 승마에 꽂힌 것이다. 무언가에 혹 빠져서 열정을 갖게 되는 순간의 간절한 눈빛을 보면 부모의 가슴도 덩달아 뛴다. 아들의 홍조 띤 얼굴에서 그 열정을 보았는데 어찌 모른 체 하랴. 그것도 지금, 여기, 제주가 아니면 경험하기 어려운 일인 것을. 아들과 딸은 말을 한 바퀴 더 탔다. 아들의 말이 앞서고 딸의 말이 한 치 뒤에 간다. 두 번째라고 말 고삐를 잡은 분이 특별히 재밌게 태워주셨다. 아저씨가 거의 뛰다시피 하며 빠르게 달려주신 거다. 그런데 아들의 말이 풍! 풍! 방귀를 뀐다. 뒤에 가는 딸은 앞 말이 뀌는 방귀를 맞으며 재밌다고 웃는다.
네 시 40분. 민속촌을 나섰다. 여섯 시엔 공항으로 출발해야한다. 남은 시간은 한시간 20분. 뭘 할 수 있을까 의논했다. 첫날 못 본 다원을 들러보고 싶었지만 거리상 불가능했다. 공항 가는 동선서 멀어지지 않으면서 제주에서만 할 수 있는 일. 춘자싸롱 잔치국수. 물론 여행서에서 호감가게 소개를 한 덕이기도 하지만, 아이들과 나는 워낙에 국수를 좋아한다. 아빠는 춘자싸롱을 찾아 나섰고, 표선 면사무소 주위를 몇 번 돌다가 결국 지나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 찾았다.
송송 썬 쪽파 몇 조각과 빨간 고춧가루 넌둥 만둥 얹어서 냄비째 주는 춘자싸롱 잔치국수! 처음엔 두 그릇을 시켜서 맛만 볼 생각이었는데, 사리 추가를 해가며 5인분을 나눠먹었다. 멸치 말고 뭔가 더 들어간 듯 비밀스런 맛. 제주에 다시 가면 뭘 하고 싶냐 물었더니 몇 꼽는 일 중 하나가 ‘국수 먹기’라고 할 만큼 맛있는 국수였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숙소에 묵으며, 여행지 식당을 다니며 딸이 궁금해 하는 일 중 하나가 왜 사람들이 제주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가 하는 거였다. 학교 수업시간에 제주도 사투리는 알아듣기 어렵다고 배웠는데, 2박 3일을 다니는 동안 사투리로 인한 의사소통의 불편함커녕 사투리 자체를 듣지 못했다. 그러니 제주도 사투리가 진짜 특별하기나 하냐고 내게 말했었다.
그러나 국수집을 찾은 동네 아주머니와 아저씨와 주인 아주머니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는 ‘제주도 방언은 알아듣기 어렵다.’는 말에 완전히 수긍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새삼 느꼈다. 여행의 목적을 삶의 이해와 동감에 두고 있다면 관광지를 벗어나라. 평범한 일상의 터전으로 다가가 보라. 그곳의 삶이 보일 것이다. 너무나 다른, 그러나 너무나 같은 인생이 응원해 줄 것이다. ‘힘내! 사는 건 다 비슷해. 너의 둥지에서 네가 행복하길 바랄게......’
왜 제주도에서 제주도 사투리를 안 쓰냐고 의문을 제기했던 딸은 국수집을 휘젓던 진한 사투리를 인식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자, 지금부터 제주 방언을 시작합니다.’ 하고 나누는 대화가 아니었기에 국수에 열중한 딸에겐 사투리도 그냥 남들의 ‘말소리’였을 뿐이리라.
자리를 털고 나와 우리의 둥지를 향해 귀로에 올랐다. 하루 동안 우리와 인연을 맺었던 차를 반납하고 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를 기다리고.......일상을 다시 시작하고...
추상적 대상을 구체적 존재로 바꿔주기 위해,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지식을 위해 여행은 필요하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비행기도, 시커먼 현무암도, 한라산 눈밭도, 우묵한 일출봉도, 바람 거센 마라도도, 맥박이 뛰는 승마도, 모두가 살아서 꿈틀대는 구체적 대상이 되어 아이들의 성장과 더불어 커 갈 것이다.
체험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키워가며 행복도 함께 커가길 기도하며 2박 3일의 제주 여행을 더듬어 마친다.
2013년 4월 1일. 엄마.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