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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07 참 행복한 겨울이었습니다. (1)
  2. 2011/09/26 <해리 포터> 동경과 질투를 ...
  3. 2011/09/01 수용미학적 관점에서 본< 어린왕자> (2)

참 행복한 겨울이었습니다.

2011년 가을 이후에서 2012년 봄 이전에 이르는 그 겨울은 조용하면서 한가로웠습니다. 욕심에 벅차지 않았고, 무위에도 자조감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한파에도 적응을 하였습니다. 새벽이면 실내온도는 15도를 넘기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외부온도와의 차이가 30도 이상 된다는 그 사실에서 인류를 살아남게 만든 문명의 힘을 느낄 수 있었기에 실내온도 15도에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음악을 들었습니다. 시적이고 상징적이고 무한한 상상을 일깨우는 노래 ‘소낙비’를 듣고 또 들었습니다. 음악을 들었다 하기 보단 소낙비라는 노래가 우리와 함께 겨울을 났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듯합니다.

음악은 음악대로 흐르게 놓아두고 책을 읽었습니다. 유리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을 따라 자리를 옮겨 앉으며 읽고 또 읽었습니다. 뛰어노는 아이들 웃음소리를 들으며 읽는 것도 참 좋았지만, 다 같이 둘러앉아 읽을 때는 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요함 속에서 아이들은 웃고 떠들고 놀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내는 그 모든 소리는 고요함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자연의 음악이었습니다. 적막을 고요로 바꿔주는 음악.

한가롭되 쓸쓸하지 않고 고요하되 적막하지 않은 나날. 나에겐 그 나날의 힘이 하고 싶은 것 보다 해야 할 것이 더 많은 나날을 보낼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오늘을 보내는 힘으로 소진되지 않고 추억이란 자산으로 남아 훗날 인생의 역경을 이겨내는 힘으로 살아날 겁니다.

12월 23일부터 1월 6일까지 14박 15일의 작은학교 겨울 캠프.

12월 23일 밤에 하리하우스 도착해서 곧장 잤습니다.

12월 24일 마당에 있는 난로에 은행잎을 모아 불태우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난로 속 불꽃은 아이들 성에 차지 않는지 바베큐 통에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놀았습니다. 물론 불씨가 남지 않게 잘 껐습니다.

12월 25일 블루마블을 하고 나는 ‘정리해라’ 했는데, 진슬이는 ‘정리하자’ 라고 했습니다. 나는 알게 모르게 배어있는 명령식 언어습관을 반성했습니다.

12월 26일 앞 개울에 얼어있는 얼음을 깬다고 한참을 놀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의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지승이와 진슬이는 개울에 빠졌습니다. 물은 무릎 깊이도 되지 않아서 위험하진 않지만, 와서 옷을 갈아입고 씻고 하느라고 좀 춥긴 했을 겁니다.

12월 27일엔 한지에 그림을 그려서 2012년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진슬이는 틀린 곳을 다른 한지를 찢어 붙여 여러 장을 완성했습니다. 지승인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하고 다시하고 하다 결국 한 장을 그렸습니다. 지윤이는 시원시원하게 쓱쓱 그리며 조금 맘에 안드는 부분에 연연해하며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지승이를 안타까워했습니다. 결국 다 채우지 못한 달은 다음에 온 나은이와 선미의 몫이 되었습니다.

12월 28일 마당 구석구석 남아 있는 은행잎을 모아 더 태웠습니다. 아이들은 불태우기가 놀이가 아니라 일종의 노동이란 걸 깨달았는지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난롯불에 콩을 구워주겠다고 회유책을 썼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낙엽 모으기에 심드렁해진  아이들은 냇물에서 얼음조각을 주워다 뜨거운 난로위에 얹어놓고 그 치직거리는 모양을 보며 즐거워하였습니다.

12월 29일 걸어서 상리의 저수지를 보고 상학을 지나 금수산 초입까지 갔습니다. 놀며 놀며, 다리 아프다고 떼쓰며 한시간 넘게 걸었습니다. 걷는데 지윤이 갑자기 말합니다.

“엄마, 내 눈으로 내 입술이 안보이는 게 섭섭해.”

어제는 난롯불 끄는 데 ‘천연의 침이 있잖아!’ 하더니 오늘은 본인 눈으로 본인 입술이 안보이는 게 섭섭하다니... 걸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저절로 나나 봅니다.

한 시간을 넘게 걸어 도착한 금수산 입구에는  외삼촌이 일하시는 야외데크 공사현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간다고  피워논 모닥불을 끄는 데 지승이와 진슬이의 '천연의 오줌'을 사용했습니다.  포크레인 터 파기 작업에서 나온 칡을 얻어왔습니다. 갈 때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린 길을 올 때는 차를 타고 10분도 안 걸려 왔습니다.

12월 30일 아이들은 초콜릿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지윤의 글에는 초콜릿에 대한 동경이, 진슬이의 글에는 초콜릿을 보는 사회 경제적 관점이 드러났습니다. 지승이는 글쓰기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냥 인정해주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12월 31일 아빠와 진슬이 가족과 귀농해서 사과농사를 짓는 친구 가족이 왔습니다. ‘사과 아저씨’ 덕분에 야구와 축구를 하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정말 환상인 시간을 보냈습니다. 진슬인 ‘사과 아저씨’의 꾐에 빠져 고추밭에서 겨울바람 맞고 더 매워졌을 고추를 따 먹고 매워 죽는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중학생 나은이와 선미는 아이들이 포기한 새해 달력을 완성해서 그려주었고, 진슬이 지승이 용선이와 진하까지 머슴아 넷은 죽이 맞아 놀았습니다.  마르라고 바구니에  널어놓은 칡을 용선이가 맛있다고 씹어 먹자 지승이와 진슬이도 따라 먹었습니다. 먹는 것도 놀이 같았습니다.

2012년

1월 1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고 차 마시고 하다가 새벽이 되었습니다. 매년 금수산에서 해맞이 행사를 합니다. 주차장에서 하는 행사라 어린아이들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맞이를 가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사과 아저씨’ 왈, “맨날 뜨는 해를 뭘 보러 가냐?” 합니다. 농사 짓다가 아마 득도를 했나 봅니다.

새해 아침에 모두를 떠나보냈습니다. 좀 쓸쓸하였는지, 한가해서 좋았었는지 그 느낌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생각으로 떠난 사람보다 남은 사람이 조금 더 섭섭하다는 것만은 맞는 것 같습니다.

1월 2일 성희와 완이가 놀러왔습니다. 당근을 강판에 갈아 우유와 베이킹파우더, 설탕을 넣어 전기 오븐에 넣어 놓고 약수터에 물을 뜨러 갔습니다. 여름에 진현이 가족이 왔을 때 약수터에 물을 뜨러 가다가 뱀이 있어 되돌아 왔던 길이지만, 다행히 눈밭에는 뱀 걱정을 안해도 되는지라 맘 편히 갔다 왔습니다. 물을 뜨러 갔다 온 사이 당근케이크가 익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당근 케이크에 감동했습니다.

1월 3일 나의 할머니와 외할머니께서 동그란 쟁반상에 콩을 부어놓고 고르시던 걸 생각하며 콩을 골랐습니다. 쭉정이도 고르고 돌도 고르고 벌레에 가장자리를 물어뜯긴 것도 고르고 뒤틀린 꼬투리 조각도 골라냈습니다. 한 줌을 쟁반에 덜어서 버릴 것들을 다 골라내고 둥글고 온전한 콩들만 남겨 되에 부었습니다. 한 참을 걸려 몇 번을 하여도 되가 차지 않습니다. 그래도 지겨운 줄 모르고 숙인 고개가 뻐근하도록 고르고 골랐습니다. 그래서 되를 채우니 낡은 되 안에 가득 찬 까만 콩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 지 각도를 달리하여 사진도 찍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지윤이와 지승이는 책을 뒤적이며 놀았습니다. 아직 진득하니 앉아서 콩을 고를 나이는 아닌지, 콩 고르는 일에는 영 관심이 없습니다. 콩타작을 할 때는 도리깨를 들고 달려들던 지승이도 콩 고르는 일에는 손도 대지 않습니다. 콩을 고르다 하루를 다 보냈습니다.

1월 4일 성희와 완이도 떠나고 오롯이 남아 조용조용 보냈습니다. 오래 읽어오던 ‘적과 흑’을 덮었고 이제 무엇을 읽을까 하다 메일러의 ‘나자와 사자’을 집었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해리포터를 읽고 또 읽으며 마법세계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올해 12살이 되었는데, 호그와트로 오라는 편지를 받지 못했다고 실망하기에 호그와트로 가는 편지는 만 12살이 되어야 받는다고 기다림의 여지를 두게 말해주었습니다. 지윤 지승이 상처 없이 호그와트에 대한 꿈을 접을 시간을 벌어두려는 계산입니다. 아니면 우리 아이들이 만 12살이 되면 진짜로 아무도 모르게 마법부에서 보낸 입학허가서를 문 부엉이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

1월 5일 외할아버지께서 단양 눈썰매장에 데려다 주셨습니다. 튜브를 타고 올라가는 리프트가 없어져서 걸어올라 갔습니다. 썰매도 튜브로 바꼈습니다. 썰매장 크기도 반으로 줄었는데, 성인용 슬로프를 폐쇄하고 중간 높이의 어린이용 슬로프만 사용했습니다. 그래도 옛날보다 속도는 더 나는지 아이들은 무척 재밌어했습니다.

1월 6일 정리를 했습니다. 지윤이 방과후 수업이 있어서 등교를 해야 하는 데다 그동안 어지른 것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계획을 하고 시작한 대대적인 정리였습니다. 나와 있던 물건을 제자리에 넣어 두는 일만 하는데도 한 참 걸렸고, 아이들이 커서 필요 없다 싶은 물건은 고민하고 판단하고 분리하여 버리는 데 또 한 참 걸렸습니다. 정리를 마치자 지윤이가 말합니다.

“그 전엔 어린이 집 같았는데, 이젠 한 중학생 쯤 된 집 같아요.”

아이들이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집도 더불어 한 살 더 먹었습니다. 언젠가 우리 집은 고등학생 쯤 되어 보이고 또 언젠가 대학생 쯤 되어 보이겠지요. 그리고 더 나이를 먹고 먹으면 다시 어린이 집처럼 보일 날도 오겠지요. 온갖 블록과 장난감으로 가득 찬 어린이 집으로 회귀하겠지요. 언젠가는....

개학을 하고, 시답잖은 등교를 며칠 하고, 또다시 봄방학을 맞아 하리로 갔습니다. 겨울 방학의 아쉬움은 봄방학으로 달랬지만, 봄방학 다음엔 한참을 기다려야 여름방학이 되므로 그저 원 없이 놀게 해주었습니다. 세준이도 같이 봄방학을 보내게 되어 더욱 즐거웠습니다.

아이들은 주로 데크에서 놀았습니다. 집안의 온갖 살림을 다 꺼내어 데크에 각자 집을 지었습니다. 처음엔 1인용 돗자리에서 시작한 집이 방석에 베개까지 갖추게 되고, 서로 재산을 늘리느라 집안에 있는 작은 책상과 찻상, 야외용 테이블까지 동원하고 난리를 떱니다. 언제 또 저렇게 놀아보겠나 싶어 그저 흐뭇한 맘으로 바라만 봅니다. 지난 겨울처럼 ‘소낙비’를 한없이 흘려들으면서.

봄이 오는구나 싶게 따뜻한 햇살에도 음지에 언 얼음은 녹을 줄 모릅니다. 집짓기 놀이가 시들해지면 냇가 음지에 폭포처럼 물이 얼어붙은 곳에 매달려 한참씩 놀기도 합니다. 그러다 냇물에 발목을 적시고 오기를 몇 번씩 되풀이 하기도 합니다. 물에 빠졌다고 들어오는 녀석을 보면 ‘발 시리겠다, 얼른 씻고 옷 갈아입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속에서는 빨래 거리 많아졌다고 잔소리 하고 싶은 맘이 굴뚝에 연기처럼 피어오릅니다. 그래도 참습니다. ‘니들이 언제 또 이렇게 놀아보겠니.’ 하고 참습니다. 내 어린 추억에 옷 버린다고 잔소리 들었던 일은 없었던 것 같아 나도 배운 대로 하는 것입니다.

세준이를 보러 오신 세준이 외할머니 덕에 치킨에 과자도 먹었습니다.

하루는 숲속의 헌책방 ‘세한서점’까지 한 40분을 걸어갔습니다. 거기서 오래 된 계몽사판 ‘소년소녀 세계위인전집’ 몇 권을 샀습니다.

또 하루는 걸어서 과방재를 넘어 외갓집엘 갔습니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 주는 재 하나를 넘는 데 1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걸어간 덕에 내 추억 속의 저수지를 보았습니다. 기억 속의 저수지는 무서움이 들 정도로 넓은 저수지였는데, 다시 만난 저수지는 큰 연못 정도로 보였습니다. 세상 살면서 턱없이 보는 눈만 커졌는지, 아님 저수지를 연못으로 여길 만큼 가슴이 넓어진 건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이들의 놀이는 어른 입장에서 보면 어지르는 놀이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정리하라는 말을 달고 살 밖에. 그런데 저희들도 한꺼번에 정리 하려니 힘이 들었던지 이런 말을 합니다.

“야, 우리 5분 놀고 5분 정리하자.”

“우리 정리 하고 다~~놀자.”

결국 하루 종일 어지른 걸 한꺼번에 정리하느라 매일 저녁이면 잔소리를 해야 했지만, 저들 스스로 정리의 당위성은 깨달은 듯합니다. 나의 잔소리는 '해라'와 '하자'사이를 오갔습니다.

하루는 마당 은행나무에 그네를 매어주었습니다.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멋진 그네를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수평이 맞는 가지를 찾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손잡이가 하나고 엉덩이 받침이 없는 외줄그네를 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아이들은 막대기 하나를 척 걸치고 거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그네를 잘만 탑니다. 기운 센 어른이 줄을 뒤로 잔뜩 잡아 당겼다가 놓아주면 ‘와!’ ‘악!’ 소리를 지르며 좋아합니다. 어찌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네를 어른은 꼭 붙들라며 밀어주고, 애들은 좋아라 깔깔대며 잘도 탑니다.

하루는 아이들이 등 뒤에 이름표 하나씩을 붙이고 놉니다. ‘런닝맨’을 하는 겁니다. 술래잡기의 새 이름 ‘런닝맨’.

또 한번은 세준이가 와서 나에게 ‘골드천’을 달랍니다. 보니 아이들이 보자기를 어깨에 두르고 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준이가 말한 ‘골드천’이 황금색 보자기를 의미함을 알았습니다. 세준이에게 ‘골드천’을 찾아주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술래잡기가 ‘런닝맨’이 되고 누런 색 보자기가 ‘골드천’으로 진화해온 세월의 간극을. 세월이 더 흐르면 나의 황금박쥐는 골드박쥐가 될 공산이 큽니다. 그러나 어린이의 순수함은 술래잡기와 런닝맨, 황금과 골드의 간극을 지나 영원할 겁니다. 하리하우스 작은학교가 어린이의 순수함을 지켜주는 든든한 성이 되게 하고 싶다는 꿈을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고요와 평정 속에서 도약과 설렘을 맛보며 지낸 작은학교의 겨울을 반추하며, 다가올 여름방학을 준비합니다.

2012년 6월 7일

하리하우스의 겨울을 추억하며

작은학교 선생님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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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그네 2012/06/21 1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릴적 방학의 추억이 기억 납니다.공부한다고 서울와서는 방학에 놀아본 기억이 없습니다. 정말 원없이 즐겁게 놀았던 방학은 시골에서 살때 마지막으로 경험해 본 것 같습니다. 솔바람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어릴적 방학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그때의 기억, 그러니까 30년전 기억인데도 아직 그 기억은 즐겁기만 하네요. 아아들에게 방학의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는 것도 부모로써 해야할 일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에휴우...

조앤 K 롤링을 떠올릴 때 저절로 나오는 감탄사입니다.

에휴우...

그녀에 대한 동경과 질투심을 동시에 쏟아 내는 감탄사입니다.

너무나 멋진 마법사 세계를 창조해 낸 그녀에 대한 동경이며, 동시에 그녀와 같은 재주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질투입니다. 그런데 그 질투의 근본은 그녀와 같은 재주가 없음에 대한 시기가 아니라 그녀가 갖게 된 돈에 대한 시기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신비한 동물 사전’과 ‘퀴디치의 역사’라는 호그와트 교과서를 사주며 그녀가 누리게 된 경제적 풍요에 대한 시기심을 좀 버릴 수 있었습니다. ‘신비한 동물 사전’과 ‘퀴디치의 역사’로 인한 수익금은 전액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쓰겠다고 하는 구절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조금 더 많이 가지려고 모으고, 없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가지려고 모으는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을 버리고 일부분을 타인을 위해 바친다는 건 아름다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알기에 그녀에 대한 질투의 일부를 존경과 애정으로 바꾸어 볼 수 있었습니다. ‘신비한 동물 사전’과 ‘퀴디치의 역사’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지 말고 사서 각 가정에 한 권 씩 비치해 두길 권하는 바입니다. ㅎ ㅎ

에휴우...

<해리 포터>를 떠올릴 때 저절로 나오는 감탄사입니다.

에휴우...

<해리 포터>에 대한 동경과 질투심을 동시에 쏟아 내는 감탄사입니다.

너무나 재미있는 <해리 포터>에 대한 동경이며, 동시에 그와 같이 재미있는 세상을 먼저 발설해버린 <해리 포터>에 대한 질투입니다. 그리고 그 질투는 곱디고운 우리 딸의 질투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마법사 이야기를 쓰면 <해리 포터>를 ‘저작권 침해’하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는 딸의 염려에 동조하는 엄마의 질투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마법의 세계를 다룬다고 저작권 침해에 해당되는 게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마법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로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만들어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불행한 예감이 <해리 포터>에 대한 질투의 근본에 깔려 있습니다.

동경과 질투가 뒤섞인 마음으로 아들과 함께 <해리 포터>를 읽습니다. 주로 내가 소리내서 읽고 아들은 듣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아들은 눈뜨자마자 <해리 포터>를 읽어 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학교에 갖고 갈 준비물 챙기는 일엔 영 관심이 없으면서 오늘은 읽다 만 <해리 포터> 아즈카반의 죄수를 읽겠다고 가방에 넣어 갔습니다. 뒷 이야기가 궁금하니까 스스로 읽어 보겠다고 가방에 넣어 가는 걸 보니 목이 아프도록 읽어 준 보람이 느껴져서 뿌듯한 아침입니다.

<해리 포터>는 학교 영어 교과서로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읽을 만한 책입니다. 그건 재미있기도 할뿐더러 아이들이 꼭 배워야 할 ‘용기와 의리’로 똘똘 뭉친 책이기 때문입니다. 악에 맞서는 해리의 힘은 영웅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늘 ‘용기’와 ‘의리’에서 출발합니다. <해리 포터>의 곳곳에서 청소년이 가져야 할 덕목인 ‘용기’와 ‘의리’라는 이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해리포터> ‘비밀의 방’에서 말포이가 헤르미온느를 잡종이라고 했습니다. 정작 본인인 헤르미온느는 그 말의 의미조차 모르건만, 론은 말포이이게 주먹을 휘두릅니다. 왜냐하면 잡종이란 단어는 친구에게 쓰는 말이 아닌 걸로 아는 론이기 때문에 친구인 헤르미온느를 잡종이라 부르는 말포이를 상대로 싸울까 말까 고민하는 여지없이 그냥 달려들어 주먹을 날려 싸우는 겁니다. 론이 달려들어 싸우는 걸 보고 해리 역시 말포이 패와 붙어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친구인 론이 분노하는 걸 보면 분명 같이 싸워줘야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 주먹질의 정당성을 논하기에 ‘의리’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말은 없습니다. 옳은 측은 옳은 측대로 그른 측은 그른 측대로 ‘의리’를 지키려고 주먹질에 가담합니다. 친구가 싸우는 걸 팔짱끼고 쳐다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론과 해리가 말포이와 말포이 친구들을 상대로 한 패싸움을 잘 한 일이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친구가 의로운 일로 싸울 땐 거들어야 한다는 엄마의 암시를 지혜로운 우리 아들이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해리포터>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말포이는 론의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을 놀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론은 말포이가 한마디만 더 하면 곧 주먹을 날릴 기세입니다. 그리고 론 곁에 있던 해리도 여차하면 주먹판에 뛰어들 자세를 취합니다. 왜냐하면 친구의 자존심을 말포이가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자존심은 곧 나의 자존심입니다. 친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녀석들에 대한 주먹질. 그 역시 ‘용기’와 ‘의리’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다보니 우리 아들의 주먹이 생각납니다. 가녀리고 부드러운 사랑스런 아들의 주먹! 아들들의 주먹이 이렇게 가녀리고 부드러운 것이 걱정될 때 엄마들은 태권도를 보내고 싶어지나 봅니다. 싸움박질 가르치는 데가 아니건만, 아들이 건너야할 청소년기의 주먹질을 생각하면 태권도가 대안으로 떠오릅니다. 이런 불손한 생각을 하다니...

내가 에리히 캐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책을 통해 친구들과의 우정과 의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리 포터> 역시 용기 있는 세 친구의 모험을 통해 우정과 의리의 가치를 일깨워 주기에 더욱 가치가 빛납니다.

그리고 해리가 더 좋은 이유는 그가 타고난 ‘용기’와 ‘의리’의 화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고민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거란다.” 덤블도어 교수가 한 번 더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네가 톰 리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해리,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통해 나타나는 거란다.”

매 순간순간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삽니다.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볼 것인가 끌 것인가, 심지어 믹스로 할 것인가 원두로 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늘 선택을 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단순한 것이 아니고 인생 행로를 나눌 수 있는 것일 때 더 많이 고민을 합니다. 그렇게 고민되는 선택의 순간에 ‘의리’를 ‘용기’있게 선택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되길 바라며 동경과 질투를 뒤섞어 <해리 포터>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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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미학! 受容美學!

열네 살에 <어린왕자>를 읽었습니다.

그 후로 한 30년 동안에 열네 살에 만났던 어린왕자를 참 많이도 우려먹으며 살았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볼 때도, 코끼리를 먹은 뱀을 생각할 때도, 여우를 생각할 때도, 장미를 볼 때도, 시간 약속을 해 논 기쁨을 표현할 때도 열네 살의 추억 속에서 어린왕자가 걸어 나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린왕자는 순수의 상징으로 우정의 대명사로 사막의 우물처럼 귀하게 살아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딸이 어린왕자를 뽑아 드는 걸 보았습니다. 딸은 여느 동화책처럼 어린왕자를 후딱 읽어치웠습니다. 그리고 딸이 하는 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재미도 없고.’

순수의 상징으로 맑음의 대변자로 어른들을 질책하는 어린왕자를 역시 순수하고 맑디맑기 그지없는 내 딸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모순입니다. 그래서 어린왕자를 다시 읽었습니다. 순수가 순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어린왕자와 내 딸 사이에 장벽으로 있는 걸까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아! 역시나 <어린왕자>는 아름다운 동화였습니다. 그런데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습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 그러니 열 살 난 딸에겐 당연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재미 없는’ 동화였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만약 <어린왕자>를 읽고 너무 재미있다고 하는 열 살짜리 어린이가 있다면 분명 그 어린이의 정신세계는 한 서른 쯤, 아님 한 마흔쯤에 가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혹시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아이라서 사막과 별 간의 여행과 밀밭과 밀밭색이 나는 어린왕자의 흩날리는 머리칼을 3D로 상상해서 읽었다면 재미있을 수도 있겠구나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평범하게 순수하고 평범하게 맑은 상상력을 가진 어린이라면 <어린왕자>는 ‘뭐가 뭔지 모르겠고 재미도 없는’ 게 당연할 겁니다.

1900년 프랑스 리용에서 태어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비행사였습니다. 1921년 공군에 복무하면서 비행사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1926년에 <비행사>, 1929년에 <남방 우편 비행기>를, 1931년에 <인간의 대지>를, 1941년에 <야간 비행>을, 1942년에 <싸우는 조종사>를, 그리고 1943년에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와 <어린 왕자>를 썼습니다. 그리고 연합군 정찰비행대에 들어간 생텍쥐페리는 1944년 7월, 코르시카섬 기지에서 정찰을 떠난 후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어린왕자>는 20대의 <비행사>와 30대의 <남방 우편 비행기>와 <인간의 대지> 그리고 40대의 <야간 비행>과 <싸우는 조종사>,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 너머에 있는 소설입니다.

작품은 작가의 가치관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왕자>는 인간 생텍쥐페리의 가장 깊고 성숙한 성찰이 투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40을 넘긴 작가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가치는 ‘선택과 책임’입니다. 그가 여우와 어린왕자의 입을 통해 말하는 ‘길들임’이란 선택한 대상에 대한 '익숙함'을 뜻하고, 뱀과 어린왕자의 입을 통해 말하는 ‘돌아감’이란 선’한 대상에 대한 ‘책임’을 뜻합니다.

그 책임이란 ‘길들인 대상에 대한 예의’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길들인 사람을 대하는 데 가장 필요한 가치. 책임, 믿음, 예의.

<어린왕자>는 뻔뻔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를 길들여버린 장미를 향해 떠납니다. 그 장미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장미가 아니라 수천 수만 송이 장미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어린왕자는 자신의 장미가 있는 별을 향해 떠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 별을 향해 떠나게 도와주는 역할을 뱀이 합니다. 아담과 이브 사이에 뱀이 있듯이 어린왕자와 장미 사이에 뱀이 있습니다. 금단의 과일을 따 먹으라고 뱀이 꼬드기듯 금단의 선을 넘어서라고 뱀이 꼬드겼습니다. 뱀은 어린왕자를 어디로 보냈을까요.

열네 살에 읽었던 <어린왕자>에서 나는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보아구렁이를 보았고, 방울소리를 내는 우물과 수천의 사연 있는 별을 보았다. 그리고 길들여지길 원하는 여우를 기억했습니다.

사십여 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는 <어린왕자>에서 지나친 명령은 하지 않는 슬기로운 왕을 보았고, 교만을 가릴 만큼 아름다운 장미를 보았고, 선택에 대한 책임감으로 번뇌하는 ‘여린왕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번뇌를 끊어주는 뱀을 보았고, 지중해 바다에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작가 생텍쥐페리를 보았습니다.

---어린 왕자는 뱀을 향해 걸어갔다....

79쪽

뱀은 마치 금팔찌같이 왕자의 발목을 돌돌 감고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건드리는 사람은 제가 나왔던 땅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되는 거야. 그러나 넌 순진하고 게다가 다른 별에서 왔으니까..... .”

왕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같이 연약한 사람이 이처럼 바위투성이인 지구에 오다니, 참 가엾은 생각이 드는구나. 만일 네가 네 별이 못견디게 그리워져 돌아가고 싶다면 어떻게 하든지 도와 주겠어. 그리고...... .”

---생텍쥐페리는 전쟁의 포화 속으로 날아갔다....

---어린 왕자는 장미에 대한 책임감으로 지구를 떠나 자신의 별로 돌아갔다....

89쪽

“내가 나의 장미꽃을 소중히 여기는 건...... .”

왕자는 이것도 잊지 않도록 되풀이해서 말했습니다.

“사람이란 이런 소중한 일을 잊어버리고 있어. 그러나 너는 이걸 잊어서는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지키지 않으면 안 돼. 장미꽃과의 약속을...... .”

100쪽

왕자는 한참 동안 있다가 또 말했습니다.

“너 좋은 독 갖고 있니? 날 오래 아프게 하지 않을 자신 있니?”

나는 가슴이 뭉클해져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조금 있다가 또 말했습니다.

“이젠 저리 비켜.... . 나 내려가고 싶어.”

그 때, 나는 담 아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곳에는 30초 안으로 사람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노란 뱀 한 마리가 왕자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105쪽

“하긴 두 번째 물 때는 독이 없긴 하지만..... .”

105쪽

어린 왕자는 내 손을 잡고 몹시 걱정이 되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지 말 걸 그랬어. 걱정을 하게 될 테니까. 난 죽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야.... .”

나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아저씨, 그 곳은 너무 멀어. 이 몸뚱이를 가지고 갈 수 없단 말이야. 너무 무거워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몸뚱이는 헌 껍질 같은 거야. 헌 껍질 같은 건 버려도 슬프지 않아......”

106쪽

왕자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젠 다 왔어. 나 혼자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게 가만 내버려 둬 줘.”

그러면서 왕자는 모래 위에 앉았습니다.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어린 왕자는 이렇게 또 말했습니다.

“이거 봐 아저씨, 내 꽃 말이야..... 난 그 꽃에게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그건 정말 약한 꽃이야. 그리고 순진하고, 바깥 세력에 대항하여 자기의 몸을 지키는 거라곤 네 개의 자그마한 가시밖에 없는 꽃이야...... .”

107쪽

어린 왕자는 잠깐 망설이다가 일어서서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습니다.

그러나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왕자의 발목 근처에 노란빛이 번쩍 빛났습니다. 어린 왕자는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리도 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마침내 나무가 쓰러지듯 조용히 쓰러졌습니다. 땅이 모래이기 때문에 소리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생텍쥐페리는 무엇에 대한 책임감으로 코르시카섬을 향해 날아갔던 것일까....

20대의 <비행사>와 30대의 <남방 우편 비행기>와 <인간의 대지> 그리고 40대의 <야간 비행>과 <싸우는 조종사>,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그의 소설을 끝맺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그의 삶도 매듭지어졌습니다. 전쟁 중 정찰비행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작가는 혹시 <어린 왕자>가 아닌 ‘여린 왕자’와 같은 선택을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이기에 순수의 상징 <어린왕자>를 두고 이런 의문을 품어볼 수 있는 게 아니겠나 합니다.


2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대학교 때의 지도교수님을 뵈었습니다.

“선생님, 예전에 읽지 못했던 세계명작소설들을 요즘 읽고 있는데요,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십대에 이런 책을 읽었던들 얼마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요.”

그 때 교수님께서 딱 집어주신 한마디.

“그렇게 접근하는 게 바로 수용미학이지.”

‘이런 소설을 나이 스물에 읽은들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으랴’와 ‘이제야 이런 소설을 읽다니’ 하는 감정의 교차점에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정리해주는 단어.

수용미학! 受容美學!

리얼리즘이나 참여문학이 아니면 한쪽으로 젖혀놓고 보던 스물의 시절에 들었다면 ‘수용미학’이란 단어는 귓등으로 넘겼을 단어입니다. 그러나 ‘스물의 나이였다면 내가 뭘 알았을까?’ 하고 안타까워하는 나이에 듣는 ‘수용미학’이란 단어는 그 자체가 한편의 시처럼 감동적이었습니다.

수용미학.

스승으로부터 받은 화두를 외듯 ‘受容美學!’을 외며 어린왕자를 다시 읽었습니다. 그리곤 생각했습니다.

‘누구든 만남을 선택해야 하는 나이가 되면 어린왕자를 읽어보라 해야지. 인연을 쉽사리 만들지 않고 인연을 쉽사리 버리지 않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어린 왕자>를 읽고 마음에 내내 ‘여린 왕자’가 남아 생각함에 측은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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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솔바람 2012/06/14 1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의 스승님께서 달아주신 댓글입니다.

    ---
    옥이가 직접 체험한 대로 <어린 왕자>를 10대의 소녀 때 읽었을 때와, 이제 불혹의 나이를 넘어

    다시 읽어 볼 때의 같은 텍스트에 대한 수용 미학의 편차는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겠지요.

    어렸을 때는 텍스트의 글자를 따라 그 의미를 단순하게 조합하고 그에 따라 작품이 주는 의미나

    감동 혹은 교훈을 읽어내기에 급급하는 '단순 수용'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겠지요.

    그러나 이제 이제 원작자와는 너무나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먼 거리에 있는 한국의 한 중년의 여성독자로서

    <어린 왕자>가 주는 의미는 작자의 의도를 넘어 그 텍스트를 선택적이고 분석적으로 바라게 되고 독자 자신의

    독특한 시선과 지평으로 그 작품이 놓여 있는 지평과 새로운 융합을 얻어내어 마침내 '분석 비평적 수용'의 단계로

    진입하게 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옥이의 비평적 글이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어린왕자를 '여린왕자'로 읽어내는

    비평적 시각과 선택적 가치의 발견이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하겠지요. 특히 거기서 '인연'과 '책임감'의 가치를

    발견해낸 것은 옥이라는 탁월하고 성숙한 독자가 아니면 쉽사리 발견할 수 없는 것일테지요.

    그러면서 다른 독자라면 <어린 왕자>를 통해서 그 여린 모습의 원천이 되는 미지의 세계로의 끝없는 지향성에도 얼마간의 순수한

    가치가 숨어있을 거라는 해석을 생텍쥐페리의 코르시카 섬으로의 비행과 융합시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차제에 욕심을 부린다면 이제 옥이의 그 원숙한 '분석 비평적 수용'의 단계는 보았으니 수용미학의 마지막 단계인

    '창의적 수용'의 단계를 보여줄 것을 기대해 마지 않겠어요. <어린왕자>에 못지 않은 성인적 동화의 세계를 직접 창작해내는

    그런 단계를 기대한다는 거지요.

    그럼 이만 줄이고..

  2. 솔바람 2012/06/14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에게 어린왕자를 소개해주신 스승님의 댓글입니다.

    --
    지난 달에 싱가폴에 있는 딸한테 갔다가,

    마침 라이온 킹 뮤지컬을 하기에, 거금을 들여 갔다.

    시작부터 끝까지, 정말 감동과 환희가 가득했지.

    영어로 말하는 거 제대로 알아들으려고 대본을 대강 읽고 갔는데도,

    완전 만족스럽지가 않아서,

    집에 와서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서 옛날의 영화로 나온 라이온 킹을 다시 봤지.

    완전 다른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어.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가 무대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는데 (너무 착한 역이어서 - 인사하는데, 악당 스카에세 관중들이 큰 박수를 주더라고, 그의 연기 때문에...),

    그런데 혼자 음미하며 보는 영화 속에서 심바 아버지의 하는 말들 속에서 그 사상과 책임감 등이 마음에 들었어.

    농담 같은 티몬과 품바의 대화에서도 마음에 콕콕 와 닿는 말들이 있고...

    전에는 그렇게 못 느끼고 그냥 웃어버리고 만 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어릴 때 보던 라이온 킹과 나이 들어 보는 라이온 킹, 또 늙어서 보는 라이온 킹, 전부 다른 감동을 주겠다는 생각을 했지.

    고등학교 때 읽었던 소설도 지금 보면, 구석구석 더 많은 의미를 느낄 때가 있어.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드라마를 보면서 더 많이 우는 거 같아.

    모든 사람에게 내가 다 이입되거든. 그래서 주인공이 울 때마다 우는 거지. 내용들이 내 경험과 비슷한 것이 있을 때는 더하고.

    삶의 경험이 그 모든 이해의 폭을 넓혀 주는 것이겠지.

    그래서 정말 좋은 책은 나이들어서 다시 한 번 읽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어린 왕자도 그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어린이나 어른을 위한 것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가족이 함께 보는 책이라 하면 어떨까?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거기서 느끼는 것이 다를 것이고.

    설혹 그 깊은 내용을 다 이해 못하더라도, 그 아이가 느끼고 얻는 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