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케스트너'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9/16 딸 과의 대화 - 십오 소년 표류기
  2. 2007/05/22 삼중당 문고에서 시공주니어까지

딸의 학교 일기 주제가 친구 사이의 우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뭐 특별히 쓸 게 없다고 고민을 하기에 옆에서 조언을 했습니다.

“지윤아. 그럼 이러면 되잖아, 수학 시간에 니가 발표한 답이 틀렸을 때 ‘에이 지윤아 그게 아니지~~.’하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건 기분 나쁘고 속상하니까 틀려도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쓰면 되잖아. 작은 일에서 친구 기분을 생각해 주는 게 우정이라고”

그런데 결국 그 안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발표를 안하겠다는 딸이 간접적으로라도 불만을 이야기 할 기회를 가지면 속상한 게 좀 풀릴까 싶어 위로 겸 한 제안이었는데 딱 거절입니다. 우정에 대해서 쓸 말이 없다고 고민을 하다가 갑자기 <십오 소년 표류기> 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딸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지 내가 먼저 말했는지 하루 지난 시점에서 막 헛갈립니다. 그러나 어쨌든 <십오 소년 표류기>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우정에 관한 딸의 일기 숙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저녁에 아빠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십오 소년 표류기>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빠도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동네 할아버지께서 선물해주신 <십오 소년 표류기>를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다고, 다음에 아빠도 다시 읽어 보겠노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아빠는 소년들이 두 패로 갈라졌다는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이 책을 다시 읽고 딸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길 바라며 그날이 오면 지승이도 읽고 요 아래 지윤의 글에 댓글을 달아주길 바랍니다. 책을 읽고 같이 대화하는 가족, 꿈꾸던 이상형의 가족입니다.

어제 일기를 쓰는 딸을 보며 일기나 독후감은 시켜서 되는 게 아니라 쓰고 싶어서 써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일기가 얼마나 쓰기 싫으면 어른들에게도 일정 분량을 정해주고 매일 일기를 쓰라고 해야 한다는 둥, ‘일기는 지겨워’ 라는 제목으로 일기를 쓰는 둥 몸살을 하는 딸이 한 장 반이나 되는 분량의 일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아주 즐거워했습니다. 일기나 독후감이 연습이 필요한 건 맞습니다. 그러나 연습을 지나쳐서 본 경기엔 출전도 못 할 일이 벌어지면 안 되는 것처럼 일기나 독후감도 적당히 연습시켜야 합니다. 학교생활에서 그 ‘적당히’를 정하기가 어려워서 힘들지만, 교사의 몫이 바로 그 ‘적당히’를 잘 하는 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대충’의 의미보단 ‘적절히’란 의미의 적당히.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 대한 믿음이 그 ‘적당히 교육’의 바탕입니다. 내 아이들의 선생님들께 신뢰를 보내며 <십오 소년 표류기>를 시작합니다.

**** 살아남기 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일명 학습만화라는 미명하에(^^ ?) 살아남기 시리즈와 *** 보물찾기 시리즈로 아이들에게 친근한 책입니다. 외사촌 오빠들이 물려주어서 시리즈를 그야말로 시리즈로 구비하게 된 지윤지승이 방학 내내 그 책만 보려해서 결국 금서로 지정을 했습니다. 볼만큼 보아서인지 아님 만화책과 줄글책이 있을 땐 당연히 만화책으로 손이 가게 된다는 걸 인정해서인지 살아남기 시리즈를 싸서 치우는 데 동의 했습니다. 지승이 줄글을 줄줄 읽을 줄 알아 그 재미를 알게 된 연후에 금서에서 해지 시켜줄 생각입니다. 다른 친구들도 하리하우스 도서실을 ‘만화방’이라 부르기에 취한 조치이기도 합니다.

그 *** 살아남기의 원조 이야기가 쥘 베른의 <십오 소년 표류기>가 아닌가 합니다. 같은 계열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과 이후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위기 상황을 이겨내는 인간의 지혜와 운명 공동체 안에서 협력과 분쟁을 내용으로 하는 책들입니다. 권력욕이 인간성에 감동되어 화해하는 내용이 <십오 소년 표류기>라면, 미지의 자연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화해할 수 없는 공황상태로 치닫는 것이 <파리 대왕>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나 <톰 소여의 모험>은 집단의 ‘살아남기’ 라기 보다는 개인의 끈기와 기지로서 고립 상황을 이겨내는 이야기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로빈슨 크루소>나 <십오 소년 표류기>, <파리 대왕>의 상황설정은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극한 상황이라면 <톰 소여의 모험>은 톰의 가출 소동 정도이니 비교 상황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톰 소여의 모험>은 같은 작가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나 에리히 캐스트너의 <라스무스와 폰투스> 정도의 책과 같이 이야기 되는 게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십오 소년 표류기>를 떠올림에 줄줄이 <톰 소여의 모험>이 떠오르는 건 교육의 힘이 아닌가 합니다. 학창시절 ‘<십오 소년 표류기>와 <톰 소여의 모험>은 모험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배웠던 때문에 나도 모르게 저절로 줄줄 떠오르게 된 겁니다. 여기서 나의 기준으로 굳이 구분을 하자면, <로빈슨 크루소>와 <파리 대왕>은 어른들을 위한 살아남기 모험담이고 <십오 소년 표류기>는 청소년을 위한 살아남기 모험담이고 <톰 소여의 모험>은 <라스무스와 폰투스>와 같이 어린이를 위한 가출 모험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십오 소년 표류기>는 아이들이 더 커서 읽기를 바랬는데, 2학년 때 딸이 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다며 해를 넘기고도 자주 꺼내보니 더 깊이 이해할 여지가 남아서 다행입니다. 아들이 이 책을 재미있게 볼 때까지 딸의 <십오 소년 표류기>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책의 원제목이 <2년간의 휴가>랍니다. ‘휴가’ 라는 말만 들어도 책의 내용이 비극적이지 않음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끝이 해피엔딩이라 아이들이 읽기에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우정에 관한 지윤이의 일기

제목: 사랑

선생님께서 <친구사랑>을 주제로 일기를 써 오라고 하셨다. 이 일로 나는 지금 열심히 생각중이다. 무순 내용을 쓸 지 말이다. 아! 생각났다. 나는 이 내용을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3-3반 친구들아~

안녕! 나는 며칠 전에 <십오 소년 표류기>라는 책을 읽었어. 그곳에 나오는 15명의 소년들은 모두 사이좋게 지내는 친구들이야. 그렇지만 단 2명, 브리앙과 드니팬이라는 소년만이 사이가 나빴어... 하지만 결국엔 먼저 싸움을 브리앙에게 잘 걸던 드니팬도 미안하다고 말하며 다시 우정 깊은 15명의 소년들로 되었어.

그리고 한가지 웃긴 이야기를 들려줄게.

그 15소년 중 서비스라는 아이가 있어. 하루는 3~4명의 소년들이 탐험을 하다가 함정을 하나 발견했어. 그 함정들 중 하나의 함정엔 뼈들이 있었어. 그것을 보고 윌콕스라는 아이가 뼈를 주우려 함정 속으로 내려갔어. 그러고는

“네 발 달린 짐승이야. 다리 뼈가 넷이나 있어.”

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서비스가

“다섯 발 달린 짐승은 아직 못 보았거든.”

하고 말했어.

그 말을 듣고 그 서비스만을 제외한 3명의 아이들이 하하하 하고 웃었어.

나는 이 얘기를 듣고 안 웃을 수가 없었어. 내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 이 4 소년, 즉 15명의 소년들처럼 즐겁게 웃고 지내자는 이야기야~~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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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리드 린드드랜과 에리히 케스트너의 작품들



내가 처음으로 삼중당문고를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 심 훈 의 상록수를 읽으면서였다. 국어 선생님께서 --승명자 선생님! 어디 계세요? 인도로 교회 개척사업 가셨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는데 그 후론 알 수가 없습니다. 제게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사랑의 씨를 뿌려주신 분이랍니다. 혹시 소식을 알고 계신분은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을 만나면 그저 따뜻하게 꼭 안아 드리고 싶습니다. 가나 초콜릿을 유난히 좋아 하셨던 선생님, 뵙고 싶습니다. -- 독후감 숙제로 내 주셔서 읽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 때 느꼈던 책읽는 기쁨이 가슴을 파고 든다. 상록수 이후 이광수의 책을 읽었다. 유정, 무정, 흙, 사랑. 이후 난 학교 앞 분식집에서 파는 햄버거보다 책방에 꽂혀있는 삼중당문고를 더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한 삼중당문고에 대한 사랑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이어졌다. 한 때 내 희망은 삼중당문고 전권을 내 책장에 꽂아놓는 거였다. 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지 못했다. 삼중당 문고에 대한 꿈을 다 이루기 전에 다른 잡다한 책들에로 관심이 옳아갔기 때문이다.


지윤이 지승이 책 때문에 꽂을 자리가 없어져서 어른들 책은 박스에 싸 놓았는데, 이제 하리하우스가 완성되면 어떻게든 책꽂이를 마련해서 나의 삼중당문고도 꽂아놓고 싶다. 같은 시대의 추억을 지닌 벗이 오면 한 권 뽑아 주리라. 금수산 산자락 밑에서 읽으라고.


아마도 전집을 좋아하는 것이 내 성향인가 보다. 얼마 전에 시공주니어 베스트문고 50을 구했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물론 내가 먼저 읽어야 이야기가 통하므로 난 더 열심히 읽고 있다. 오늘로서 30권을 읽었다. 빨리 나머지 20권도 읽고 싶은 욕심에 -너무 재미있어서- 그 전에 읽던 반지의 제왕도 5권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나를 부르고 있지만 잠시 기다리라 하는 수밖에.



1.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아스트리드 린드그랜 지음


오늘은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를 읽었다.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뒤죽박죽 별장에 살고 있는 삐삐의 원작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라스무스와 폰투스> 라는 작품을  읽으면서도 작가의 유머감각에 반했는데, 역시 거칠 것 없는 삐삐의 입을 통해 나오는 유머가 책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밥도 안 해도 되고, 빨래도 안 해도 되고, 청소도 안 해도 되고 애들도 안 챙겨도 되는 날이 한 일주일만 된다면 -그런 날이 주부들에게 주어지는 휴가일 텐데, 아무래도 너무 욕심이 크지?  - 나머지 20권을 후딱 읽어 치울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아이들 돌보고 틈틈이 읽는 재미가 더 감칠맛 나고 좋기도 하다. 이제 애들이 유치원에서 올 시간이다. 마중 나가야지.


생각난 김에 마저 읽지 못한 삼중당문고 시리즈를 헌책방 세원북에서 찾아봐야겠다. 지금은 그 시절 삼중당 문고는 교보에도 없으므로...





2. <하늘을 나는 교실> <내가 어렸을 적에> -에리히 케스트너


얼마 전 한 일간신문에서 클래식 음악 평론가에게 인터뷰를 한 내용을 읽었다.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신 분이 바로 자신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표제만 읽고 나는 ‘아 이분의 어머니도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신 분이신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어머니께서 직접 음악을 연주해 주신 것이 아니고 세 번에 걸쳐 클래식 대전집을 사 주셨던 기억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전집은 누나들이 결혼을 하면서 갖고 갔고 그래서 다시 세 번째로 클래식 대전집을 사서 자신에게 주셨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어머니께서 자신에게 베푸셨던 건 클래식 대전집이 아니고 음악에 대한 영감이라고 했다. 물질을 받으며 정신을 읽을 주 아는 아들이었기에 같은 전집을 서 번씩 사 주셨던 어머니의 뜻이 헛되지 않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한 인간의 내면이 성장하는 데 어머니의 존재가 미치는 영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 중의 하나가 <하늘을 나는 교실>이다. 에리히 케스트너라는 독일 작가의 작품인데 학교사회 안에서 빚어지는 청소년들의 우정, 선생님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과 제자에 대한 진정한 사랑, 그리고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갈등과 그 갈등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역시 세계적 작가의 작품답다는 감동과 함께 어른들도 못 읽어 본 사람이 있으면 꼭 읽어 보시라고 하고 싶다. 내 마음이 촉촉하게 젖음과 동시에 아들딸이 이렇게 크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 것 같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있는 겨울방학에 집으로 갈 차비를 보내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마르틴의 엄마가 마르틴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참지 못하고 훌쩍거렸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마르틴처럼 아들의 입장이 아니라 엄마의 입장에서 읽었기 때문에 더 가슴 아팠던 것 같다.


글 속에는 작가의 경험이 여기 저기 녹아있게 마련이다.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했던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였기에 마르틴의 마음과 마르틴 엄마의 마음을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었으리라.


사실 <하늘을 나는 교실>의 -머리말 하나-는 약간 엉뚱하게 시작된다. 동화 작가인 내게 어머니께서 ‘올해에도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못 쓰면 선물을 안 줄 테다.’  하고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나는  8월에도 눈이 보이는 츄크슈피체 산기슭으로 글을 쓰러 와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머리말 하나-의 내용이다. 참 이해가 안 되었다. 다 큰 아들에게 크리스마스에 대한 동화 한 편을 못 쓰면 선물을 주지 않겠다고 선전포고 하는 어머니는 뭐며, 어머니의 선전포고가 무서워 한 여름에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중 인물은 도데체 뭘 의미하는 걸까 하는 의문에 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말하는 마마보이에 대한 언급일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하고 <하늘을 나는 교실>을 덮었는데, 아무튼 어머니 등쌀에 못 이겨 쓴 작품이 너무 아름답다는 거다. 결국 어머니 등쌀이 아들에 대한 관심과 격려의 몫을 단단히 해 낸 것이다.


항상 머리말을 재미있게 쓰는 에리히 케스트너가 그의 가장 빼어난 작품의 머리말에 등장시킨 것이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내가 어렸을 적에>를 읽고 알았다. 에리히 케스트너에게 있어서 어머니란 존재는 바로 문학적 영감의 보고였던 것이다. 케스트너가 작가로서 가지는 상상력과 감수성, 직관력과 판단의 근거는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얻게 된 선물이었다. 그런 선물을 받은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그의 책 <에밀과 탐정들> <에밀과 세 쌍둥이>에서도 보여준다. 아들의 글 속에서 아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 어머니의 모습.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에>를 읽은 후엔 아이들에게 인생을 아름답게 해 줄 영감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하나를 더 갖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있다. 그 어머니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배워간다. 말투와 자잘한  습관, 먹는 것에 대한 기호까지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때론 생존의 차원이 아닌 영혼의 경지에 대한 모범을 어머니를 통해 보기도 한다. 

도덕적 신념이나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어머니를 품고 사는 자식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 그런 아름다운 자식으로서 살아가기를 나는 원한다. 나는 내 어머니를 진정 사랑하고 존경하므로.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쯤 어머니께서 환갑기념으로 동남아를 다녀오신 적이 있다. 그 때 방문한 나라 중 싱가포르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표현 하셨다.


“ 그 나라는 담배꽁초 버려도 벌금이 많데. 얼마나 깨끗하게 잘 해놨는지 몰라. 그 나라를 보니 ‘아하, 솔고개도 잘 가꿔서 사람들이 오도록 만들어야겠다.’ 이런 맘이 들데.”


 그 후로 어머님은 해외여행이라는 걸 한 번도 더 다녀오신 적이 없다. 대신 솔고개 자투리 땅엔 두릅을 심고 산에서 취나물을 한 포기 한 포기 캐다 심어 취나물 밭을 만드셨다. 사람 오는 걸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찾아 손이 오시면 어머닌 두릅을 따 주시고 취나물을 데쳐 나물을 무쳐 주신다. 그리고 그 두릅과 취나물을 팔아 어린이 날 선물로 손주들을 위해 절편을 뽑아다 주신다. 그런 어머니의 손길 자체가 나에겐 영감의 보고이다.


나 또한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간 것 말고는 그 흔한 동남아 한 번을 못 가봤다. 그래도 해외 여행 하는 걸 낙으로 삼는 사람과 비교하여 나의 삶이 짜증스럽지 않은 것은 내 어머니의 신념을 내가 존경하기 때문이다. 내 고장을 아름답게 가꿔서 사람들이 오게 만들어야지 하고 말씀하신 어머니의 마음속엔 가 보시지 못한 미지의 세상마저도 품을 수 있는 기개가 있음을 자랑스러워 하는 딸이기에 나는 해외여행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도 교육적 공간 하나를 잘 가꿔 사람들이 오게 만들어야지 하는 희망 하나를 품게 되었고 이제 그 희망을 ‘작은 학교 이야기’를 통해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내게 희망을 심어 주신 나의 어머니께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 아이들에게 희망을 품게 해 주는 엄마가 되어야지 라고...


어머니를 도와 두릅을 따 본 적이 있다. 그 때 ‘언젠가 두릅에 대한 시를 써야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 떠오른 시 행 하나를 두릅을 먹을 때 마다 생각한다.


-봄 하늘을 똑똑 분질러 따듯

두릅을 딴다. -


봄에 두릅나무는 길쭉한 가시 막대기처럼 일자로 서있고 두릅 순은 그 꼭대기에서 피어난다. 키 크고 메마른 줄기 끝에 피어나는 두릅 새순을 딸 땐 까치발을 하고  서야 할 때도 있는데, 아래서 올려다 본 두릅의 배경은 푸른 하늘이었다. 서정주의 시처럼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기에 좋은 눈부신 봄 하늘. 두릅 몇 송이 따며 바라본 솔고개 봄 하늘에 대한 추억이 가슴 저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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