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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솔농원에서 지승,태헌,태완,지윤
 

장서가 삼대가 지나야 진정한 독서가가 나온다.
사람은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은 가을에만 읽는 게 아니라 늘 읽는 것이다.

오늘 아침 일곱 살인 아들이 나에게 와서 꾸짖듯 하는 말

“ 엄마 책쟁이야? ”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해리포터를 읽으면 나도 다시 읽을 거다.
그래야 말이 통할 테니까.
하리 하우스를 계획하게 된 시발점에 우리 가족의 도서관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우리 가족의 도서관을 만들어서 여럿이 쓰리라.


책, 백일 때부터 읽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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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눈에 힘이 생겨 색과 형태를 구분하기 시작할 때부터 책을 읽어 주었다. 그 전에 형님 댁에서 책을 물려받아 갖다 놓은 것이 있었는데,  ‘아직 뭘 ~ .’ 하고 놓아두었던 것을 꺼내 읽어 주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께서 한 곳을 응시 할 수 있게 된 손녀딸을 TV 앞에 앉혀놓고 TV를 보여주신 일이 계기가 되어 책을 꺼내게 되었다

. 백일 정도 된  딸을 향해

“지윤아, 여기 책 있어. 이제 부턴 책 봐. 알았지?”

라고 말했다. 그 얘긴 할아버지 할머니께 아이들을 위해 책을 읽어 주시라고 부탁드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아이들에게 책을 잘 읽어 주셨다. 함께 살던 고모와 아빠도 책을 잘 읽어 주셨다. 그 덕에 우리 아이들은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딸은 책 읽어달라고 하는 정도가 심해서 졸릴 때 읽어달라고 할 때는 아무리 예쁜 딸일지라도 화가 나는 정도이다. 덕분에 딸은 언어 구사 능력이 좋고 자기 입장을 논리적으로 따져서 얘기를 잘 한다. 물론 개인차가 있어서 아들은 딸 만큼 책에 매달리진 않지만 아직까지 책을 안 봐서 걱정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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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들이 처음 본 책은 주로 의성어 의태어와 사물의 이름이 나온 책들이었다. 두껍고 코팅이 되어있는 책이라 입에 물고 빨아도 찢어지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모두 물려받은 책이라 발행된 지 10년이 넘은 것들이었는데 내용은 어떤 책보다 좋았다.

그 후 아빠가 처음으로 사 준 책이 <달님 안녕> 과 <사과가 쿵!>이다. 그 두 책은 표지는 단단하지만 속지는 앏아서 여러 번 투명테이르로 붙이고는 하였다. 그래도 책을 찢었다고 야단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땐 일부러 찢은 게 아니었으니까.

다음으로 분유와 함께 미피와 보리스가 주인공인 책 4권이 왔다. 책의 크기가 손바닥 크기고 테두리가 곡선으로 되어 있어서 잘 갖고 놀았다. 오늘 그 네 권을 늦둥이 낳은 집에 갖다 주었다. 매번 받기만 하다 동생 준다고 챙겨가는 아이들 모습을 보니 대견하고 즐거웠다.
책 읽기는 습관이다. 그냥 책이 삶의 일부인 것이다. 생명유지를 위해 밥을 먹듯 책을 읽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책읽는 습관을 몸에 베게 만들어 준 가족들깨 감사드린다.

오늘도 잠자기 전에 <당나귀 실베스터와 요술 조약돌>을 읽었다. 읽으면서 밖에 나갔가가 서로 잊어버리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얘기를 나눴다. 그래서 엄마 아빠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꼭 손을 붙들고 다녀야 한다는 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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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누워서 <꼬마 철학자 우후> 중 아이스크림 100개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부분을 읽었다. 우후가 아이스크림 100개를 상상만 해도 기쁜 것처럼 우리 아이들은 우후의 아이스크림 100개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으로 아이스크림에 대한 갈증을 달래는 것 같다. 결국 우후가 아이스크림보다 더 중요한 떨어지지 않는 무엇의 소중함을 알았듯 우리 아이들도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요즘 사주고 싶은 책이 있어 값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조카들이 보던 책을 전집 통째로 들고 올 땐 몰랐는데, 막상 내가 사주려고 하니 책값이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여태껏 우리 여기저기서 물려받은 것으로 우리 아이들 정신세계가 구축되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우리 아이들이 인류발전에 공헌하는 인물들이 되어 그 고마움에 답하기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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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리 하리하우스 전경


<작은 학교 이야기>는 책 제목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집 이름을 작은학교 이야기라고 정했냐고요. 그건 <작은 학교 이야기>의 정신을 우리집 하리하우스에서 실현하고 싶어서입니다. 여러 교육학자들이 나오고 각자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하지만 공통의 정신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너무 진부하다고요? 사랑의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할 땐 그렇죠. 하지만 <작은 학교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사랑은 ‘작은 실천’을 요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옷을 기워 입는 실천은 바로 ‘자원보존과 지구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었고요,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방법이라고 가르쳐주더군요. 그래서 아끼며 살고 아는 것을 공유해 나가는 것이 바로 작은 학교를 내 안에 만드는 것이란 생각을 늘 하고 살고 있습니다.

머릿속에  정의 되는 작은학교 이야기가 설 땅이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 해답을 ‘가정’에서 찾았습니다. 가정이 우리 사회구성의 가장 기본 되는 단위인 만큼 내가 꿈꾸는 작은학교는 ‘아름다운 가정’을 토대로 하리하우스에서 펼쳐질 것입니다.  하리하우스는 작은학교가 꿈꾸는 사랑의 체험장이 될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존중되면서 상호 작용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관계. 하리 하우스의 작은 학교 이야기가 그 아름다운 관계를 꿈꾸며 시작됩니다.

작은학교 이야기는 크게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읽을 것과 놀 것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할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추구하는 하나의 정신은 바로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지키면서 사회와 지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실천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리 하우스 홈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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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에 관한 이야기>
작은학교에서 만드는 먹을거리의 원칙은 간단히 조리 할 것, 화학 첨가물을 넣지 않을 것, 한국적인 맛을 찾아 갈 것, 그리고 낭만적인 것입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서 음식에 관한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면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특히 식객이 불러 일으킨 감정은 음식에 대한 낭만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70년대의 낭만을 찾아 갑니다.


홍합에 대한 푸짐한 추억

“홍합이요, 홍합. 싱싱한 여수 홍합이 한 바구니 한 바구니 2천원. 홍합이요 홍하압.”

그래 홍합 한 바구니 2천원으로 푸집한 저녁을 만들 요량을 했다가 결국 6천원을 쓰게 되었다. 원인은 ‘자연산’의 망에 걸린 것.
‘싱싱한가’ 생각하며 리어카로 다가가서 홍합을 살폈다. 그런데 먼저 사신 아주머니가 자리를 안 떠나며 내게

“저쪽 거 사요. 저쪽 거. 그게 자연산이라 좋대. 비싸도 저거 사요.”

하고 말을 건네셨다.

“자연산이요?”

하고 관심을 보이자 홍합 파는 아저씨의 설명이 이어진다.

“이건 양식이고 이건 자연산인데, 맛이 틀려요. 이건 속이 꽉 찼다니까. 봐요. 떨이로 싸게 줄 테니 이거 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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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연산과 양식의 차이를 묻자 자연산은 해녀들이 직접 딴 거란다. 내가 보기에도 자연산은 양식 홍합과 달랐다. 양식은 껍질이 얇고 홍합에 불순물이 거의 붙어있지 않고 표면의 색이 거의 일정하게 검은색에 가까웠다. 반면 자연산 홍합엔 작은 소라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도 있었고 껍질의 색도 흰 색을 띄는 부분부터 짙은 고동색까지 다양하였다. 투박하고 거친 외모, 육중한 무게. 지금까지 먹던 홍합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서 결국 자연산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이다. 하긴 처음부터 자연산을 꼭 사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왜 마음이 자연산 홍합으로 기울었는지 모르겠다. 온통 인공투성이의 세상에 살다보니 ‘자연’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혹 넘어간 것 같다.
저녁 밥상 차리는 시간에 딸이 와서 막 담아놓은 홍합그릇을 보더니

“야, 홍합이다. 홍합!”

하고 아들을 불러냈다.
보통때 같으면 한 그릇을 홀랑 까먹고 한 그릇 더 달래서 먹는 아이들이 통 속도가 붙지 않는다. 야들야들 부드러운 양식 홍합에 입맛이 들은 아이들에겐 쫄깃쫄깃을 넘어 질긴 느낌까지 주는 자연산 홍합이 맞지 않는가 보다.

그래도 딸은 양식 홍합에선 볼 수 없었던 어린 게를 먹는 재미에 좋아라 한다. 홍합이 잡아먹었던 게가 소화되지 않고 있다가 홍합이 익어서 입을 벌리자 통째로 나온 거다. 딸이 홍합 속  에 있는 게를 먹는 것은 맛 보단 일종의 이벤트였던 것 같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홍합을 요리할 때에 오늘의 추억이 떠오르리라 생각하니 나도 흐뭇해졌다.

그런데 아들은 게를 잡아먹고 있는 홍합이 비위에 맞지 않았나 보다. 홍합도 평소보다 덜 먹고 게는 먹으면 게가 죽을 때 아플테니까 그냥 상자에 넣어 두잔다.  (혹시 사과를 입에 물은 백설공주가 누워있던 관을 생각했을까?) 아무튼 약육강식의 먹이사슬구조가 딸에겐 특별한 맛의 경험이 되고 아들에겐 죽음과 아픔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게를 먹지 말고 상자에 넣어두자고 떼를 쓰는 바람에 결국 저희들 새끼손톱만한 게 두 마리를, 그것도 삶아진 게 두 마리를 대접에 물을 담고 동동 띄워놓았다. 이미 죽은 새끼 게이지만 죽는 것과 아픈 것을 면해주고자 하는 아들의 마음을 알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홍합은 뜨끈 뜨끈한 국물 속에서 입을 쫙 벌리고 있는 홍합이었다. 그러나 내 기억속의 홍합은 죽어서 아프다거나 슬픈 홍합이 아니라 맛있고 따뜻하고 재미있는 홍합니다. 살은 감칠맛 나고 국물은 따끈하고 껍질로는 국물을 떠 먹을 수 있는 재미있는 홍합탕인 것이다.

사면이 다 육지인 첩첩산골 단양에서 살던 아이가 홍합을 먹어 본 것은 70년대 서울 풍경이 준 선물이었다. 그 당시엔 등하교 길에 사먹는 군것질 거리로 홍합이 있었다. 홍합만이 아니라 멍게가 제철일 때는 멍게를 까서 팔기도 했었다. 옷핀으로 찔러 먹던 멍게의 맛은 홍합의 맛과 함께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지금이야 포장마차 서비스 안주쯤으로 인식되지만, 70년대 서울엔 길거리 리어카에서 홍합탕이 아이들 군것질거리로 팔리던 시절이니 지금보다 행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요즘 아이들의 군것질 거리에 들어있는 수 많은 향료와 색소를 비롯한 첨가제가 홍합탕엔 없었다. 그저 파 한 두 쪽이 떠 다녔을 뿐이니 건강한 먹거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내가 먹은 홍합그릇이 어떤 세척과정을 거쳐 다음 사람에게 건네졌을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나는 많이 사 먹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홍합에 대한 추억이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이젠 나의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만큼 맘껏 먹으라고 할 수 있으니 기쁘고, 즐겁게 먹어주는 아이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내 아이들도 오늘의 이 저녁으로 홍합에 대한 행복한 추억하나 더 생겼으면 좋겠다.

-핵심-
1. 국물을 뜰 때 파를 송송 썰어 띄우면 파 향이 더해져서 좋다. 마치 보글 보글 끓는 곰탕에 파를 띄우듯이.

2. 홍합에서 간이 나오므로 소금을 따로 넣지 않는다.

3. 그릇에 각각 뜨지 말고 상 한가운데 냄비째  놓고 팔 걷어 붙이고 하나씩 까먹는 홍합잔치도 좋은데, 우아하고 깔끔한 사람들은 싫다더라. 취향대로 맛있게 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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